작가는 피부과 전문의의 협조를 받아 색소 변화를 일으키는 약을 먹고 강한 자외선에 온몸을 쪼였다. 이 과정에서 심한 고통을 겪었지만 그는 결국 해냈다. 마무리 작업으로 머리를 삭발하자 중년의 흑인 남성으로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11월7일 뉴올리언스의 친구집에서 그는 흑인으로 변모한 자신과 직면했다.
“나는 집 안의 불을 모두 끄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거울을 마주하고 섰다. 내 손을 서서히 전기 스위치로 가져갔다. 나는 일부러 더 힘껏 스위치를 켰다. 흰 타일 위로 빛이 쏟아졌고 거울 속에서 웬 낯선 남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대머리에 인상이 사나운 시커먼 흑인이 거울 속에 있었다. 나와는 한 군데도 닮은 데가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작가의 ‘흑인 체험기’는 같은 해 12월15일까지 한 달여 진행된다. 이 기간 작가는 미국의 디프 사우스(Deep South·미국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등지를 가리킴. 흔히 말하는 미국 남부의 특성이 가장 집약적인 형태로 나타남) 지역을 돌아다니며 말 그대로 흑인의 삶을 체험한다. 이를 일기 형식으로 정리한 책은 출간 이후 미국 사회에 엄청난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흑백간 인종차별주의의 실상을 너무나 생생하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오른 이 책으로 저자는 유명인이 되었지만 곤욕 또한 톡톡히 치러야 했다. 그는 인신공격을 당하고, 숱한 살해 위협을 받았다. 책이 출간된 지 10여년이 지난 1975년, 백인우월주의를 내세우는 미국의 극우비밀결사집단인 KKK단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 책은 미국의 백인들이 결코 직시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1959년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의 인종차별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다. 흑인과 백인은 완전히 다른 인간이었으며, 결코 한 자리에서 같이 식사를 하거나 용무를 볼 수 없었다. 흑인 남성이 백인 여자를 쳐다보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그 중 한 대목.
여행기간 중 버스에서 백인 중년 여성에게 자리를 양보할 마음이 있었던 저자는 순간적으로 그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에 웃음을 띠며 옆 자리를 가리키며 앉아도 좋다는 뜻을 전한 저자에게 조금 전까지 피곤한 기색이 감돌던 백인 중년 여성은 파란 눈에 날카로운 빛을 번득이며 버럭 화를 냈다. “왜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죠?”
버스 안의 다른 백인들이 목을 길게 빼고 저자를 쳐다보았다. 누구도 뭐라 하는 이는 없었지만 다들 적대감으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는 바람에 저자는 흠칫 놀라 눈을 내리깔고 이렇게 말한다. “죄송합니다. 이곳은 처음이라서요.”
심지어 극장 바깥에 붙어 있는 영화 포스터 속의 백인 여성을 쳐다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이봐 거기, 대체 뭐 때문에 그 백인 여자를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건데”라고 시비를 걸기 때문이다. 흑인의 성적 능력에 대한 백인들의 상상 또한 틀에 박힌 듯 똑같았다. 백인들은 한결같이 흑인의 성 생활에 대해 병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며, 흑인에 대해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흑인은 성기가 엄청나게 크고, 매우 다양한 성적 경험을 가졌으며 지칠 줄 모르는 ‘섹스 머신’이라고 여겼다.
저자가 경험한 흑인의 비참한 삶은 흑인이 되지 않으면 결코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종류의 것이었다. 아무리 흑인 입장에 선 백인 인권운동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사망하기 1년 전인 1979년 글에서 저자는 “우리가 서로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기 전에 먼저 머리로 인식하고 그런 다음 마음속 깊이 감정적인 차원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타자’는 없다는 것, ‘타자’란 중요한 본질적 면에서 바로 ‘우리 자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 같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선 우선 타자가 돼 봐야 한다. 예컨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어떻게 조선인이나 대만인의 감정과 생활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남성과 여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극명하게 나눠져 있는 이 시대에 타자의 삶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타자의 상’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완벽하게 타자가 됐을 때만이 ‘타자란 바로 나 자신’이란 저자의 깨달음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책은 그런 점에서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체험적 교과서로 읽힌다. 타자가 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느냐는 의문이 든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 한 인간의 목숨을 건 ‘타자 되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미국 사회에서 여전히 이 책이 읽히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일 터이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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