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돈 서울대 교수 ‘삼국통일전쟁사’ 출간
“한국사에서 삼국통일전쟁은 파미르고원 이동 지역 대다수의 나라와 종족들이 직·간접으로 관계된 국제전이었다. 삼국 외에 당과 왜가 직접 참전했으며 돌궐(突厥), 철륵(鐵勒), 해(奚) 등 북아시아 유목종족들이 당군의 일원으로 동원됐다. 거란족과 말갈족의 일부는 고구려에 일부는 당에 가담해 전투했으며 몽골고원의 유목민 국가인 설연타는 고구려와 연결돼 오로도스 방면에서 당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직접 군대를 파견해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토번(티베트)의 발흥은 이 전쟁의 추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노태돈 서울대(국사학) 교수가 서기 640년대 초에서 700년에 이르는 기간 한반도에서 진행된 삼국통일전쟁의 전개과정과 여파, 역사적 의미를 살펴본 ‘삼국통일전쟁사’(서울대출판부)를 최근 출간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그동안 무수한 연구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삼국통일’이란 개념의 성립여부조차 합의가 안돼 있을 정도로 연구자들의 시각차가 큰 분야다.
사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신라인들의 ‘삼한일통’ 의식은 역사적으로 일본과의 교섭에서 ‘고려’라고 자칭했던 발해의 등장이나 고구려 정통론의 입장에 섰던 고려왕조 건국의 중심세력에 의해서도 도전받았다. 20세기 들어와 단재 신채호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중기 ‘동국지리지’의 저자 한백겸이나 조선후기 ‘발해고’를 쓴 유득공과 정조 등도 고구려 영토의 태반을 포기한 삼국통일의 영토적 불완전성에 대해 비판과 아쉬움의 뜻을 나타낸 바 있다.
그러나 고구려사 전공자인 노 교수는 무엇보다 이 책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객관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개념임을 논증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남·북한 학계의 ‘남북국시대론’이나 ‘후기신라론’, 고구려사는 중국사에 귀속되기 때문에 ‘삼국’이란 범주 설정 자체가 잘못된 시각이라는 중국학계의 ‘중국고구려사론’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노 교수는 신라의 통합으로 한민족의 기본 틀이 형성됐음을 강조한다.
고구려의 영역과 주민 중 많은 부분을 신라가 흡수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통일기 신라의 영역과 주민을 구성하는 상당부분이 고구려의 그것임도 엄연한 객관적 사실이란 것. 이와 함께 노 교수는 삼국 초기만 해도 주민들 사이에는 유사성과 함께 차이도 상당했지만 삼국시대가 진전되면서 무덤양식 등 묘제뿐만 아니라 제도·의복·종교·예술·문자생활 등에서 상호 교류에 따라 서로 비슷한 면을 공유하게 돼 통합의 발판이 됐음을 지적한다.
한반도에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은 4세기 후반부터. 하지만 노 교수는 640년대 초를 삼국통일전쟁의 시점으로 잡고 논의를 시작한다. 640년대에 들어 당나라 사신의 평양 방문과 백제 의자왕 즉위(이상 641년) 등 국제정세 진전과 함께 당의 고구려 침공계획이 구체성을 띠어 갔으며, 삼국에서 의자왕·연개소문·김춘추 등 통일전쟁의 주역들이 집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640년대 초에서 676년까지 삼국통일전쟁 전개과정을 세밀하게 고찰하고 이후 700년까지 이어진 ‘전쟁의 여진’을 살펴본 책에서 노 교수는 통일전쟁이 ‘사대교린(事大交隣)’이란 한반도 왕조의 대외정책의 기본 틀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통일전쟁 이후 당과는 사대관계로, 일본과는 교린관계로 설정한 신라의 대외정책 기조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한국 왕조의 대외정책 기본 틀이 됐다는 것이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노태돈 서울대(국사학) 교수가 서기 640년대 초에서 700년에 이르는 기간 한반도에서 진행된 삼국통일전쟁의 전개과정과 여파, 역사적 의미를 살펴본 ‘삼국통일전쟁사’(서울대출판부)를 최근 출간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그동안 무수한 연구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삼국통일’이란 개념의 성립여부조차 합의가 안돼 있을 정도로 연구자들의 시각차가 큰 분야다.
사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신라인들의 ‘삼한일통’ 의식은 역사적으로 일본과의 교섭에서 ‘고려’라고 자칭했던 발해의 등장이나 고구려 정통론의 입장에 섰던 고려왕조 건국의 중심세력에 의해서도 도전받았다. 20세기 들어와 단재 신채호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중기 ‘동국지리지’의 저자 한백겸이나 조선후기 ‘발해고’를 쓴 유득공과 정조 등도 고구려 영토의 태반을 포기한 삼국통일의 영토적 불완전성에 대해 비판과 아쉬움의 뜻을 나타낸 바 있다.
그러나 고구려사 전공자인 노 교수는 무엇보다 이 책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객관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개념임을 논증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남·북한 학계의 ‘남북국시대론’이나 ‘후기신라론’, 고구려사는 중국사에 귀속되기 때문에 ‘삼국’이란 범주 설정 자체가 잘못된 시각이라는 중국학계의 ‘중국고구려사론’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노 교수는 신라의 통합으로 한민족의 기본 틀이 형성됐음을 강조한다.
고구려의 영역과 주민 중 많은 부분을 신라가 흡수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통일기 신라의 영역과 주민을 구성하는 상당부분이 고구려의 그것임도 엄연한 객관적 사실이란 것. 이와 함께 노 교수는 삼국 초기만 해도 주민들 사이에는 유사성과 함께 차이도 상당했지만 삼국시대가 진전되면서 무덤양식 등 묘제뿐만 아니라 제도·의복·종교·예술·문자생활 등에서 상호 교류에 따라 서로 비슷한 면을 공유하게 돼 통합의 발판이 됐음을 지적한다.
한반도에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은 4세기 후반부터. 하지만 노 교수는 640년대 초를 삼국통일전쟁의 시점으로 잡고 논의를 시작한다. 640년대에 들어 당나라 사신의 평양 방문과 백제 의자왕 즉위(이상 641년) 등 국제정세 진전과 함께 당의 고구려 침공계획이 구체성을 띠어 갔으며, 삼국에서 의자왕·연개소문·김춘추 등 통일전쟁의 주역들이 집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640년대 초에서 676년까지 삼국통일전쟁 전개과정을 세밀하게 고찰하고 이후 700년까지 이어진 ‘전쟁의 여진’을 살펴본 책에서 노 교수는 통일전쟁이 ‘사대교린(事大交隣)’이란 한반도 왕조의 대외정책의 기본 틀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통일전쟁 이후 당과는 사대관계로, 일본과는 교린관계로 설정한 신라의 대외정책 기조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한국 왕조의 대외정책 기본 틀이 됐다는 것이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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