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용이 주요 덕목인 것은 우리 사회나 톨레랑스의 종주국으로 알려진 프랑스뿐 아닙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의 당선은 미국내 소수 민족의 승리라기보다 ‘관용의 승리’라는 이름으로 찬양됐지요. 관용은 오바마뿐 아니라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성적 지향에 관계없이 행정부 각료를 선임하겠다고 말한 것처럼 미국에서도 정파를 가리지 않은 채 애용되고 있습니다.
신간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웬디 브라운 지음, 이승철 옮김/갈무리)은 ‘관용’을 기존의 문법을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 책입니다. 한국어판 저자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의 목적은 관용의 실천을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관용 담론의 계보학을 추적하고, 다문화 시대에 관용론이 갖는 정치적 효과를 면밀히 분석, 이를 현대 정치에 대한 비판과 연결시킵니다.
책에 따르면 관용의 문제는 차이를 묵인하면서 이를 향한 적대행위를 줄이는 것을 유일한 대안으로 본다는 데 있습니다. 관용 담론은 특정한 차이를 문제로 만드는 역사적,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없이 기존의 체제를 보존하면서 갈등과 적대행위를 회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관용은 필연적으로 운동을 침묵시키고, 실질적인 도전과 저항을 방해하는 탈정치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겁니다. 이같은 탈정치화는 역사와 정치로 설명되어야 할 문제를 개인의 태도와 감수성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특정한 차이가 공적 논의를 통해 정치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로 상승할 수 있는 통로를 폐쇄당한 채 단순히‘관용받아야 할 특수한 것’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에 따르면 이주 노동자나 기타 소수 약자와 관련된 문제들은 시민들의 부족한 관용이 문제일 뿐 더 이상 이야기할 여지가 없어지게 됩니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관용이 서구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핵심 담론으로 기능한다는 논리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서구를 자유민주주의와 동일시하고 비서구를 근본주의와 동일시, 결국 서구의 도덕적 우위와 관용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근본주의에 대한 서구의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가 무슬림의 히잡 착용을 금지한다거나 미국이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이라크를 침략하는 것과도 맞물립니다. 물론 이런 논의에 대해서는 여러 반론도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평화와 다문화적 정의를 상징하는 용어로만 칭송되는 관용을 향해 낀, 우리 눈의 콩깍지를 벗기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적잖은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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