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6·25전쟁을 조명한 책이다. 저자는 당시 마을에서 벌어진 상호 학살 사건의 과정과 원인을 치밀하게 파헤침으로써 6·25전쟁의 미시사를 제시한다. 책에 실린 사례는 전남 진도의 현풍 곽씨 동족마을, 충남 금산군 부리면의 해평 길씨 동족마을 등 전남과 충남의 다섯 마을이다. 저자가 10여년간 해당 지역을 현장 답사하며 관련자들의 구술을 채록하고, 희생자 씨족 가문의 족보까지 꼼꼼히 조사해 얻은 연구 결과물이다.
‘왜 한 마을의 주민들이 서로를 죽이려고 했을까.’ 저자의 일차적인 연구 동기이기도 한 이 물음은 이 책의 다양한 사례연구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적인 문제의식이다. 저자는 마을에서 벌어진 주민들 간 상호 학살의 일차적인 책임을 남북한 국가권력에 돌리고 있다. 1950년 전쟁이 터지면서 남쪽으로 내려온 인민군은 점령지역의 면 단위부터 내무서를 두고 인민위원회, 농민위원회, 부녀동맹 등의 단체를 만들어 마을 단위까지 통제했다. 토지개혁을 내세워 하층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인민재판으로 마을의 주요 우익 인사를 처형함으로써 마을의 기존 질서를 해체시켰다. 정반대로 인민군이 빠져나간 뒤에는 국군과 경찰이 들어와 인민군에 협조한 부역자들을 색출해 처단했다. 그렇다면 남북한의 국가권력은 왜 이처럼 마을 공동체에 깊숙이 침투하려 했을까. 저자는 국가권력이 마을 단위까지 침투하려고 애쓴 이유가 분단정부의 불안한 위치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주장한다. 국가권력은 마을 주민들에게 상호 학살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함으로써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려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국가권력의 개입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처절한 민간인 학살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남북 국가권력의 침투가 아무리 강력했다고 하더라도 수백년간 유지됐던 마을 공동체가 어쩌면 그렇게 쉽게 무너졌을까 하는 의문점이 남는다. 저자는 20세기초 일제 식민지 하의 국내 환경변화에서 그 점을 이해해보려고 시도한다. 당시 신분제와 지주제, 친족관계에 기반을 두고 그 나름의 질서와 규율을 갖고 있던 농촌 마을은 신분제의 이완과 함께 마을 내의 위계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전쟁 이전 각 마을 공동체가 안고 있던 갈등이 해소되지 못하고 전쟁 기간에야 비로소 상호 학살의 형태로 표출됐다는 점이다. 저자가 연구한 마을의 사례들은 지주-소작인 간의 계급 갈등 외에도 친족 내부의 갈등, 마을 간의 갈등, 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 간의 종교·이념 갈등과 같은 ‘복합적 갈등구조’가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저자는 이념과 계급의 갈등보다는 친족, 마을, 신분 간의 갈등이 민간차원의 학살에 보다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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