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일 오후 패션디자이너 루비나(62)씨의 전화 목소리는 만족감과 허탈감이 섞여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이날 서울 강남구 청담동 플럭서스 빌딩에서 열린 SFAA(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 컬렉션에서 패션쇼를 펼쳤다. 2012년 봄·여름 시즌을 위한 이번 컬렉션에서 그는 모던 레트로(Modern Retro), 즉 현대풍의 주조에 복고 느낌을 가미한 의상을 선보였고, 객석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큰 행사를 치른 후인 만큼 휴식을 취할 법도 하건만, 그는 쇼가 끝난 후에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회사(‘루비나 부티크’) 일을 돌보고 있었다. “생산부 일을 점검해야 할 게 있습니다. 저는 일을 쉬지 못해요.” 젊은 시절에도 패션모델과 가수 일을 함께 하며 바쁘게 지냈던 그는 지금도 패션디자이너이자 회사 경영자로서 일에 빠져 지내는 듯했다.
지난 3일 서울 선릉의 맞은편에 자리한 그의 회사를 찾았을 때, 6층 건물의 외양에서 ‘모던하면서도 내추럴한 것’을 지향한다는 그의 패션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건물 4층의 작업실에서 패션쇼에 나갈 옷을 손수 만들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 소재에서도 자연 섬유를 많이 쓴다”고 설명했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조화시킨 그의 옷은 가수 윤복희, 이은미씨 등이 즐겨 입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 옷이라도 오래 입었던 것처럼 향기가 나는 옷을 추구합니다. 옷에도 생명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살아 있는 옷을 만드는 게 목적입니다.”
만나자마자 너무 진지한 모드로 빠지는 것 같아서 “우리 두 사람의 오늘 패션은 어떠냐”고 다소 장난스럽게 물었다. 기자는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고, 사진기자는 청바지의 평상복 차림이었다. 그는 “무난하다”며 그야말로 무난한 답을 했다. 그러면서 “요즘 사람들은 옷을 입을 때 편안함을 추구하는데, 삶을 즐기는 인간다움이 느껴진다는 장점이 있으나 너무 격식을 깨면 예의가 없어 보이는 단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날 검은색 바탕의 바지와 티셔츠에 청록색 계열의 가죽 재킷을 걸친 모습이었다. 멋을 부리지 않은 듯했으나 멋을 느끼게 하는 차림이었다.
그는 6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에 늘씬한 몸매로 감탄을 자아냈다. 젊은 시절에 당대의 섹시 스타로 뭇 남성들의 가슴을 달뜨게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으나, 30여년을 회사 최고경영자(CEO)로 살아온 그의 언행에는 연륜의 안정감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대장간에 식칼이 없다고 하잖아요. 디자이너들도 특별한 옷이 별로 없어요. 디자이너들이 블랙 계열을 많이 입는 것은 아무 옷이나 받쳐 입기 편하려고 그러는 거예요.(웃음)” 그는 보통 사람들도 검정 계열의 옷을 바탕으로 한다면 패셔너블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인터뷰를 위해 5층 자신의 사무실로 가기 전에 6층 쇼룸을 보여줬다. 쇼룸 옆에 나무들을 가꿔 놓은 빈 공간이 있었다. 거기서 단풍이 물들어 가는 선릉 숲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뷰(전망)가 너무 좋지요? 그래서 5년 전에 청담동에서 이쪽으로 회사를 옮겼어요. 일을 하다가 가끔 여기 올라와서 차도 마시고 혼자 사색을 해요. 자연 풍경이 저에게 평안을 줍니다.”
그의 사무실에도 나무 화분이 많이 있었다. 색감에 예민한 디자이너가 자연과 친화하는 것은 당연한 듯했지만, 왠지 외로운 예술인의 내면을 보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그가 이끄는 ‘루비나 부티크’는 본사와 외부 매장, 하청 공장 직원들을 합치면 100여명이 넘는 규모다. 1980년 명동 롯데백화점 지하에서 시작한 조그만 가게가 오늘에 이르렀다. 패션디자이너의 예민한 감성으로 100여명의 급여를 책임진다는 게 부담스럽지 않을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아요. 저는 최선을 다할 뿐, 돈에 관해서는 하나님께 맡겨요(그의 사무실 탁자에는 성경이 놓여 있었다). 일이 안 될 땐 어떤 이유가 있을 거예요. 계속 안 되면 그 일은 접으란 신호 아니겠어요. 어려울 땐 절약을 하고, 형편이 나아지면 고급 원단을 쓰기도 하고….”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던 그가 패션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은 우연이었다. “대학생 때 친구가 양장점에 옷 맞추러 가는 것을 따라갔는데, 거기서 사진을 한 번 찍어 보자고 해서 응했다가 패션모델이 된 것이지요. 당시 제가 다니던 여대는 모델을 하는 학생을 인정하지 않아서 4학년을 다닐 수 없었어요. 13년 동안 모델을 했는데, 국내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무대에 서면서 큰 보람을 느꼈어요.”
화려한 패션모델의 세계에서 그에게 경쟁심을 느끼게 하던 여성 모델은 누구였을까. “경쟁자는 없었어요. 당시엔 제가 톱이었으니까요(너무 당당하게 말해서 질문을 한 것이 민망할 정도였다). 사실 패션쇼는 협업이기 때문에 경쟁심을 느끼는 무대는 아니지요.”
그의 목소리는 젊은 시절처럼 여전히 허스키했다. 톤을 높이면 걸걸하게 들렸지만, 나지막하게 말할 때는 시를 읊조리는 것처럼 분위기가 있었다. 1970년대에 그가 불러서 히트한 샹송 번안곡 ‘눈이 내리네’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눈이 내리네 / 당신이 가버린 지금 / 눈이 내리네 / 외로운 내 마음에 // 지루했던 밤도 / 허무한 내 꿈도 / 깨어진 지금은 / 태양이 반기네 // 오지 않는 그 님을 / 기약없는 그 님을 / 나는 왜 이렇게….’
그는 샹송 번안곡을 주로 담은 앨범 2장을 발표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을 것으로 짐작했는데, 그는 뜻밖에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노래는 돈이 필요해서 한 거예요. 가수를 해서 방송에 나가거나 공연 무대에 서면 일단 돈을 벌 수 있으니까. 패션모델 하나만 하는 것보다 두 직업이 낫겠다고 여긴 거죠. 무엇보다 가수로서 유명해진 게 패션모델로 성공하는 데도 디딤돌이 됐어요.”
그는 신상옥 감독의 영화 촬영에 집을 빌려준 것이 인연이 돼 영화 주인공을 맡기도 했다. 1975년 서울 피카디리극장에서 개봉한 ‘여자형사 마리’가 그것이다.
“저는 영화가 만들어진 후 딱 한 번 봤어요. 함께 나온 배우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홍콩 등에서 촬영한 것은 기억납니다.”
그는 가수, 배우 활동을 했던 과거를 더 이상 되뇌고 싶지 않다고 했다. 디자이너로서 사는 현재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패션 디자인의 세계에 입문한 것은 “톱모델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만 남았음을 감지하고 미리 준비한 덕분”이었다. “모델 활동을 하면서 디자이너들이 옷을 만드는 과정을 눈여겨봤어요. 그게 오랜 시간 쌓이니까 자연스럽게 공부가 된 것이지요.” 1980년 명동에서 ‘루비나 부티크’를 시작한 그는 같은 해에 중앙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입상함으로써 디자이너로서도 일약 주목을 받게 된다.
그는 1989년 정상급 디자이너 12명(김희, 진태옥, 이신우, 박항치, 설윤형, 오은환, 박혜숙, 한혜자, 김동순, 김희진, 박윤수, 지춘희)과 함께 서울패션디자이너협의회(S.F.A)를 창립했다. 훗날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로 이름이 바뀐 S.F.A는 국내 최초의 정기 컬렉션인 서울컬렉션을 개최하는 등 한국 패션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핵심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국내 대표적 디자이너 중의 한 사람인 앙드레 김은 왜 SFAA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앙드레 김은 패션모델 루비나를 무척 아껴준 디자이너였다.
“그분은 다른 디자이너와 교류를 하지 않으시고 단독 무대를 많이 하셨어요. 우리 컬렉션에서 특별 대우를 해 달라고 하셨는데, 이건 그룹으로 하는 것이라 그렇게 해 드릴 수가 없었어요.”
SFAA는 서울시와 함께 1990년부터 매년 두 번씩 서울컬렉션을 개최해 왔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시 주관의 서울컬렉션에 참여하지 않고, SFAA 독자적으로 컬렉션을 열고 있다.
“시와 의견 충돌이 있었어요. 한 장소에서 계속 복제식으로 컬렉션을 하는 것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게 저희 의견입니다. 장소를 다양하게 하고 내용도 풍성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또한 경륜 있는 디자이너들을 홀대하고 신인 스타 위주로만 컬렉션을 이끌면 수준이 떨어진다고 봤는데, 그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따로 떨어져 나오게 됐습니다. 앞으로 시 당국과 개선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살면서 여러 직업을 거친 사람 중에는 경험의 폭이 넓은 것을 보람으로 여기는 이도 있지만,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이도 있다. 그는 어느 쪽일까.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싶어요. 제가 해 온 일 중에서 디자이너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당초 40세까지만 하자고 작정했는데, 지금도 손을 놓지 못하고 있어요. 언제까지 할지 모르겠지만, 건강하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그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젊은이들이 화려한 겉모습만 보지 말고 패션 산업의 미래 전망을 직시할 것을 당부했다.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이는 많아요. 문제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뒷받침해서 옷을 만들어 줄 기능직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에요. 오죽하면 그 일을 가르칠 수 있는 인력을 교도소에서만 구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예요.”
이미 많은 것을 성취한 그에게도 더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뜻밖에도 패션과 관련된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자폐아동을 돌보는 시설이나 양로원 등을 지원해 왔어요. 제가 국내 구호단체인 링킹더월드(www.linkingtheworld.org)의 홍보대사예요. 외국에 나가 봉사활동을 하면서 거기서 제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의 비전이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회에 가치가 있고, 이웃에게 덕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 장재선 차장(문화부)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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