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상업광고(CF) 모델을 할 때.
1970년대 상업광고(CF) 모델을 할 때.
루비나(RUBINA). 이 외국어 이름에서는 뭔가 화려한 느낌이 풍기지만, 실은 가톨릭에서 우러르는 순결한 성녀(聖女)의 이름이다.

루비나씨의 본명은 박상숙. 1970년에 패션모델 일을 시작하면서 유아 영세명인 ‘루비나’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뒤에 개신교로 개종을 하지만, 루비나라는 이름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다고 했다.

서구적 마스크를 지녔다는 평을 들었던 그는 젊은 시절에 화려한 치장을 하고 명동 거리를 걷는 것을 즐겼다. “머리를 물들이고 손톱을 길게 기른 채 액세서리를 요란하게 매달고 다녔어요. 내가 왜 그랬나 싶어요.(웃음) 지금은 귀걸이도 부끄러워 못 하고, 모자조차 민망해서 잘 쓰지 못해요.”

그는 겉보기에 화려한 직업을 가졌지만, 내향적인 성격이라고 했다. 사람들과 파티 등에서 어울리는 것을 잘 하지 못하고, 혼자서 일에 몰두할 때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껏 미혼으로 살아온 이유도 자신의 내향성으로 설명했다. “만나는 남자가 없었어요. 제 주변엔 디자이너와 원단 회사 사람들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대시하는 남자가 있었을 것 같다”고 넘겨짚자,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며 웃었다. 한때 사교계의 남녀 관계를 둘러싼 루머에 휩싸인 적도 있지만, 그것을 말끔히 털어내고 정상급 디자이너의 길을 가꿔 온 이의 자존이 엿보였다.

그는 앞으로 독신을 고집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나이 들면 짝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어느 백화점에서 노부부가 다정히 쇼핑하는 모습을 봤는데 너무 아름답게 보여서 자신도 노년에 꼭 결혼을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런데 결혼을 아무하고나 할 수 있나요? 그 사람 속을 알아야 하는데….”

그는 이 말 끝에 “30여년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쿨하게 헤어졌다”고 털어놨다. “지금까지도 감정의 여운이 있겠다”고 했더니, “그렇지는 않다”고 역시 쿨하게 답했다.

그에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 때가 언제였느냐고 물었다. 뜻밖에 “항상 힘들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죽지 않고 산 사람은 모두 힘들다고 생각해요. 가진 자든, 갖지 않은 자든 누구나 힘들지요. 예전에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걱정을 했는데, 이젠 그렇지 않아요. 어려움이 있으면 어려운 대로 헤쳐 나가면 되니까요. 내 생각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지는 것이니까요.”

▲1949년 전남 순천 출생 ▲서울예술고 ▲숙명여대 무용학과 중퇴 ▲1970년부터 패션모델, 가수, 영화배우로 활동 ▲중앙디자인 콘테스트 입상(1980) ▲서울패션디자이너협의회 창립 멤버(1989) ▲서울패션인상 ‘올해의 디자이너상’ 수상(2002)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 회장(2007~2009)

관련기사

장재선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