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獨 카를스루에大 교수 ‘피로사회’ 한국어판 출간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이며,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입니다.” 한병철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는 7일 이 시대를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성과사회’로 규정하면서 이렇게 운을 뗐다. 한 교수는 ‘성과사회’의 폐해를 날카롭게 분석한 ‘피로사회’의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방한했다. 한 교수가 지난 2010년 가을 독일에서 출간한 ‘피로사회’는 출간되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디 차이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슈피겔’ 등 독일의 주요 언론 매체들이 앞다투어 서평을 내보냈으며, 2주 만에 초판이 매진되며 2011년 독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철학서로 꼽혔다.

철학책이 이러한 호응을 얻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한 교수는 ‘피로사회’로 철학의 본고장인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피로사회’가 독일 지식인사회에서 이토록 주목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 교수는 이 질문에 “무엇보다 이 책이 소진증후군,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등과 같은 정신 질환의 역사적 위치를 보여줬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이 책은 우울증과 같은 심리 장애를 오늘날 성과사회의 근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반적인 패러다임 전환의 결과로 해석한다.

한 교수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금지·강제·규율·의무 결핍·타자에 대한 거부 등)에서 그런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능력·성과·자기 주도·과잉·타자성의 소멸 등)로의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후에 일어났다”며, 이 새로운 사회를 ‘성과사회’로 명명했다. ‘피로사회’의 핵심 테제인 셈이다.

한 교수는 “자본주의 생산성은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타자 착취’ 때보다 ‘자기 착취’ 때 효과가 높게 나타난다”며 “타자 착취보다 자기 착취가 더 큰 문제”라고 밝혔다. 가해자가 타자 즉, 다른 사람일 경우 가해자를 제거할 수 있는 반면, 자기 착취 사회인 성과사회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일해 가해자를 제거하기 힘든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한 교수는 “성과사회는 인간의 삶이 의미 있는 것인지, 좋은 것인지, 만족할 수 있는 것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성과를 내고, 더 큰 성장을 하기 위한 ‘성장을 위한 성장’을 의미해 그 폐해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현재 한국 사회 역시 성과사회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폐해와 정신 질환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역자 후기를 통해 ‘피로사회’를 해제한 김태환 서울대 교수는 “한병철 교수가 이야기하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부정성의 패러다임에서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생산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오늘날 우리 사회 학교 교육과 관련해 체벌이나 학생 인권 조례 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은 우리 역시 그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과정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성과사회’‘피로사회’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교수는 “무엇보다 스스로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런 인식을 하게 되면 가해자를 제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나 스스로가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한국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 등을 연구한 한 교수는 대학에서 철학과 미디어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김도연기자 kdychi@munhwa.com
김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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