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때문에 경희대 화학과 1학년 때 무작정 1960년대 최고 스타 김진규·김보애 내외의 집을 찾아갔다. 새벽 4시부터 기다렸으나 가정부가 번번이 가로막았다. 3일째, 김진규 내외가 집에 있다는 걸 알고 ‘순자’라고 불리는 가정부의 따귀를 때리고 소란을 피우고서야 김진규 내외를 만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과 의논할 게 있어 난리를 쳤습니다’라고 사과하면서 ‘배우도 15년 뒤 쯤이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도전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3일 뒤에 다시 오라’고 했어요.”
결국 1961년 김진규 선생 부부의 소개로 서울예술대학 자리에 ‘드라마센터’를 만든 유치진 교장을 알게 되면서 연기 인생이 시작됐다. 그곳에서 김성원, 이순재, 오현경, 김혜자 등을 만났고, 그들이 주연일 때 홍성우는 엑스트라였다. 그 뒤 홍두표 TBC(동양방송) 편성부국장 추천으로 탤런트 특채가 됐지만 배역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1973년인가. 어느날 TBC 3층 탤런트실에서 주차장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동료가 ‘저분이 작가 유호 선생님’이라고 하길래 계단을 뛰어 내려갔어요. 유호 선생 앞에서 대뜸 ‘선생님,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잘 키워주면 이 나라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할 홍성우입니다. 저 좀 키워주세요’라고 다짜고짜 말을 걸었어요”
홍성우의 당돌함에 놀란 유호는 TBC 제작부장을 맡고 있던 김재형에게 홍성우를 소개하고, 이후 ‘딸’이라는 연속극의 단역, 이어 ‘세자매’에서는 주인공역을 맡겼다. 얼굴과 연기 실력이 알려지자 사극 주인공 대본이 쏟아졌다. 그러나 쳐다보지도 않았다. 김재형 부장이 소개한 드라마 ‘형사’의 주인공도 거부했다. 현대물로 빨리 얼굴을 알려 국회로 나가야 하는데 사극이나 ‘도둑 역할’은 정치인 이미지와 맞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1974년 주말극 ‘데릴사위’를 통해 스타가 됐다. 가난한 집 출신으로 뱃심 좋고 화끈한 남자 주인공인 재벌집 데릴사위 역할을 맡아 말괄량이 외동딸(안인숙 분)의 버릇을 고치는 내용이었다. 정치 이미지 관리에도 딱 들어맞는 그것을 마다할 리 없었다. 저돌적인 연기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시청률 78%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를 바탕으로 홍성우는 도봉지역 주민들을 접촉했고, 결국 1978년 도봉지역인 서울제5지구 선거에서 야당의 고흥문, 여당의 신오철, 박정희 대통령의 사촌인 박경희 등과 무소속으로 겨뤄 금배지를 달았다.
제주 = 한강우 기자 hanga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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