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모 씨가 태릉선수촌 필승관에서 후배 국가대표들에게 직접 시범을 보이며 지도하고 있다. 런던올림픽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레슬링 부활에 앞장선 그는 여자 레슬링 육성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양정모 씨가 태릉선수촌 필승관에서 후배 국가대표들에게 직접 시범을 보이며 지도하고 있다. 런던올림픽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레슬링 부활에 앞장선 그는 여자 레슬링 육성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건국 후 올림픽 금메달 1호 양정모‘체력은 국력’, 1970년대를 풍미했던 구호 중의 하나다. 정말로 ‘체력=국력’이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한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단 한 개의 금메달도 따지 못했다. 우리 선수들이 덩치 큰 서양 선수에게 깔리고 얻어 맞는 것이 흑백 TV를 통해 본 올림픽의 전부였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62㎏)에서 부산 ‘방앗간 집 아들’ 양정모가 드디어 건국 이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다. 그 이전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생이 있었지만 그것은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딴 것이 아니었다. 양정모의 금메달은 그래서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다. 이제는 올림픽 금메달도 흔한 것이 되고 말았지만 1976년 당시의 한국 국민에게 1호 금메달은 오랜 기다림이자 사무침이었다.

금메달을 딴 양정모는 부친과 당시로는 귀한 국제전화를 할 기회를 얻었는데 “정모야, 욕봤다”고 한 아버지의 말은 한동안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런던올림픽을 두 달 남짓 남긴 지난 5월29일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선수촌에서 양정모(60) 씨를 만났다. 레슬링 훈련장인 ‘필승관’은 정확히 말하면 태릉선수촌 본마당에 있지 않다. 선수촌 정문을 더 지나 국제스케이팅장과 체육과학연구원이 있는 곳에 있다. 어찌 보면 ‘곁방살이’ 신세. 한때 올림픽에서 한국의 금메달 밭이었던 레슬링의 안타까운 현주소를 보는 것 같다.

양정모의 현 직책은 레슬링협회 ‘런던올림픽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이다. 중학시절부터 1980년 은퇴할 때까지 현역으로, 그리고 1999년 외환위기 여파로 감독을 맡고 있던 조폐공사 레슬링팀이 해체될 때까지 평생을 매트에서 살았던 그는 팀 해체 후 자유분방하게 살고 싶어 레슬링계를 아주 떠났다. 카메라를 들고 고향 부산의 상징인 갈매기를 전문으로 촬영하는 사진작가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한국 레슬링의 부활을 위해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 사이인 김혜진 대한레슬링협회장은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레슬링이 ‘노 골드’에 그치자 2011년 7월 ‘런던올림픽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양정모를 설득해 위원장을 맡겼다. 국민의 뇌리에는 아직도 양정모 하면 1976년 당시의 당당했던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양정모도 이제 이순의 나이. 레슬링 슈즈를 다시 신고 땀에 전 티셔츠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예전 그 얼굴 그대로였지만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앉아 있었다.

―당시 몽골의 오이도프에게 져 ‘금메달은 틀렸구나’ 생각했던 국민이 많았는데, 지금과는 경기 방식이 달랐죠.

“예전에는 ‘배드마크 시스템’이라는 6벌점제였지요. 폴승하면 무벌점, 판정승은 1벌점, 판정패하면 3벌점, 폴패하면 4벌점을 받았고 벌점이 6점을 넘어가면 탈락하는 방식이지요. 당시는 또 지금의 3분 2회전이 아니라 3회전 경기였습니다.”

―오이도프하고는 평생의 숙적이었죠.

“오이도프는 나 때문에 ‘몽골의 영웅’이 될 기회를 놓쳤어요. 사실 내가 금메달을 딸 수 있게 해 준 선수는 미국의 진 데이비스입니다. 데이비스, 나, 오이도프 3명이 결승리그에 진출, 메달 색을 다투게 됐는데 데이비스가 예선에서 오이도프를 크게 이겨 둘은 각각 벌점 1, 3점을 안고 올라왔죠(당시는 예선에서 싸운 상대와는 결승리그에서 재대결하지 않았다). 무벌점으로 올라온 나는 결승리그에서 데이비스를 2라운드 2분54초 만에 폴로 이겼죠. 따라서 오이도프와의 최종전에서 폴패하지 않으면 금메달이 확정되기 때문에 슬슬 방어하는 전략을 구사했지요. 1회전에서 선취점을 올렸지만 1―5로 크게 역전당했고 2회전에서 5―5를 만들었다가 5―6으로 리드를 뺏겼고, 3회전에서 8―7로 역전시켰지만 종료 1분여를 남기고 1점짜리 기술을 두 번 허용, 결국 8―10으로 졌어요. 하지만 내가 벌점 3으로 금메달, 오이도프는 벌점 4로 은메달에 그쳤지요.”

―데이비스에게 이긴 게 비디오카메라 덕분이라면서요.

“당시 협회 부회장 중에 김시중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 양반이 선수단에 흑백 비디오카메라를 사줬어요. 그걸로 데이비스의 예선 경기를 녹화해 분석했는데, ‘넬슨’이라는 기술 딱 하나더군요. (넬슨 기술을 몸으로 직접 보여주며) 엎드린 상대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상대 머리를 찍어 누르는 기술입니다. 오이도프도 여기에 걸려 대패했죠. 데이비스와의 경기 전날 비디오를 보고 넬슨만 피하면 된다는 전략을 세웠죠. 경기 중 나도 한 번 걸렸는데 사력을 다해 끝까지 방어해 냈죠. 데이비스는 다른 선수들에게 다 먹힌 기술이 내겐 통하지 않자 결국 포기해 버리더군요. ”

―상대 기술에 걸렸을 때, 어떤 생각을 합니까.

“생존본능만 살아있지 뭘 생각할 그런 계제는 아니죠. 평상시 훈련만이 위기를 극복하게 만듭니다. 불암산 크로스컨트리야말로 내게 금메달을 걸어 준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해요. 불암산 크로스컨트리는 우리 레슬링이 처음 개발했죠. 지금은 미국에서 사는 신상식 당시 코치가 생각해낸 건데, 맨몸으로 뛰는 요즘과는 달리 체급별로 모래조끼를 입고 뛰었어요. 페더급인 나는 8kg짜리를 입었는데 특히 여름이면 거의 그로기 상태가 됩니다. 코스 중간의 고갯길을 후배들은 ‘눈물 고개’라고 하던데, 우리 때는 ‘피눈물 고개’였죠. 이런 훈련이 데이비스의 넬슨에 걸리고도 머리를 제압당하지 않았던 체력과 정신력을 키운 것이라고 봐요. 불암산 크로스컨트리와 비디오카메라, 집에서 방앗간을 한 덕에 실컷 먹었던 콩국(감량 후 회복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이 금메달의 3대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해요.”

―‘평생의 라이벌’ 오이도프와의 전적은 어떻게 되나요.

“오이도프는 1974, 1975년 세계선수권 챔피언입니다. 1974년 이스탄불 세계선수권 챔피언으로서 테헤란아시안게임에 출전,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죠. 하지만 나한테 져 은메달에 그쳐 체면을 구겼죠. 3라운드 중반까지 7―7이었는데 30초를 남기고 8―7로 이겼어요. 그때 결승리그 최종전은 개최국 이란의 나바이라는 선수와 가졌는데, 팔레비왕과 왕비가 경기장에 나왔어요. 그러자 이 친구가 ‘큰 선물을 줄 테니, 져 줄 수 없느냐’고 부탁합디다. 그냥 이겨버렸죠. 내 현역 생활 중 테헤란아시안게임이 최고로 잘한 경기였어요. 대학 졸업을 앞두고 당시 최고의 실업팀인 조폐공사 입단이 확정돼 사기가 충천해 결승전까지 7전 전승을 거뒀으니까요. 이듬해 민스크 세계선수권에서는 내가 오이도프에 져 동메달에 그쳤죠. 세계선수권을 2연패한 오이도프였지만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는 나에게 막혔고 결국 나를 피해 체급을 올렸지요. 오이도프는 페더급으로는 장신인 174㎝라 대회 때마다 감량하는 게 큰 곤욕이기도 했고.”

―오이도프와는 친구처럼 지내신다면서요.

“오이도프는 나보다 세 살 위인데,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만났죠. 그러다 2002년 당시 결성된 몽골서포터스를 계기로 한·몽우호협회가 생겼는데 오이도프가 몽골 쪽 협회장을 맡았어요. 2006년 협회 쪽에서 오이도프가 양쪽 팔꿈치 신경마비 증세로 고생하자 그를 부산에 초청해 수술을 받게 해줬죠. 그때 다시 봤어요. 올림픽 금메달을 놓친 게 한이 돼서 그런지 ‘그때 올림픽 맞대결에서는 내가 이겼다’고 우깁디다.”

―레슬링은 당시 접하기 쉽지 않은 운동이었을 텐데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용두산 공원 부근에 한일체육관이 있어요. 덕원중 1학년 때 친구와 우연히 구경하러 갔는데 레슬링을 하고 있습디다. 당시는 프로레슬링이 인기라, 레슬링은 덩치 큰 사람만 하는 운동일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체구가 작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물어봤더니 ‘이건 아마 레슬링이고 우리가 올림픽에 나간다’고 합디다. 재미있을 것 같아 친구와 등록했어요. 친구는 여섯 달 만에 그만두고 나는 한번 하면 끝장을 보는 성질이라서 계속했죠.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인선수권대회 48㎏급에서 2위도 한 걸로 보아 재능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교는 아예 레슬링부가 있는 건국고로 진학했어요. 나는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두 가지를 다 잘했는데 고3 때는 양 형에서 모두 우승했죠. 그 덕에 동아대에 특기생으로 들어갔고.”

―올림픽 출전은 몬트리올이 처음이었나요.

“동아대 1년 때인 1971년 도쿄 주니어세계선수권 자유형 은메달, 그레코에서 동메달을 땄는데 이게 아마 국내 최초의 국제대회 양 형에서 동시에 딴 메달입니다. 1972년 뮌헨올림픽 때만 해도 국력이 약해 메달 유망 선수만 선발해 파견했는데 협회에서는 국제 경쟁력을 감안해 5명을 체육회에서 추천했어요. 1순위가 안천영, 그 다음이 안재원, ‘빠떼루 아저씨’로 유명했던 김영균이 3순위, 나는 주니어대회에서 올린 성적이라고 4순위로 추천됐어요. 결국 예산 문제로 체육회에서 3명만 내보냈고. 너무 낙담해서 레슬링을 그만둘 뻔했어요. 가기만 하면 ‘일’을 낼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말이죠. 이렇게 몇 달을 놀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들인 공이 너무 아깝더라고요. 귀도 다 찌부러지고. 오정용 감독님이 ‘올림픽만 있는 게 아니다. 내년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도 있다’고 설득하시기도 하고, 그래서 다시 시작했죠.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도 선발전을 통과했는데 서방권의 보이콧으로 출전이 좌절됐어요. 그게 현역 은퇴를 결심하게 된 동기가 됐죠.”

―런던올림픽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인데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선수 때 지도자의 역할은 굉장히 큽니다. 뮌헨올림픽 출전이 좌절돼 그만두려고 했을 때 오정용 감독이 내게 해 준 말 때문에 결국 올림픽 금메달을 따게 됐죠. 후배들에게 나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지금 태릉에는 올림픽 출전권을 따지 못한 선수들도 많은데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이 있다’며 격려하지요. 심리적으로 힘을 주고 사기를 올리는 것이 제 몫이지요.”

양정모의 건국 후 첫 올림픽 금메달은 제 1호라는 의미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그 금메달은 한국 엘리트스포츠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됐다. 국민들의 레슬링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고 이는 엘리트스포츠 전반에 붐을 조성했다. 몬트리올 올림픽 당시 레슬링 코치였던 정동구(한국체육인재육성재단 이사장) 씨는 청와대 귀국보고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엘리트 스포츠의 중요성과 체육대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해 말 대통령령으로 한국체육대 설립근거가 마련됐고 이듬해 3월 개교한 한국체육대는 지금까지 한국엘리트스포츠의 산실 역할을 하고 있다.

인터뷰=이동윤 선임기자(체육부) dy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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