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 감독 일행이 식당으로 들어가자 식사를 마친 최용수(39·FC 서울) 감독과 하대성(27·FC 서울) 선수가 다시 작업장으로 향했다. 최 감독은 아직 할 일이 많다며 하 선수의 손을 끌었다. 목에 두른 수건에 연신 얼굴을 비비면서도 모처럼 편한 표정들이었다. 경기장에서 보는 긴장되고 공격성이 표출되는 얼굴이 아니었다.
“직접 해 보니 생각보다 훨씬 힘드네요. 그래도 감독, 선수들과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서 뜻깊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뿌듯합니다” 정몽규(50)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는 싱크대를 옮긴 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꾸준히 이런 활동을 이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K리그 16개팀 감독과 대표 선수 그리고 팬들로 구성된 ‘K리그 사랑봉사단’은 A매치 주간으로 약 2주 동안 휴식기를 맞아 한국해비타트와 함께 다문화 가정과 기초생활수급 가정 7가구의 집을 고쳐주는 ‘사랑의 집 고치기’에 참여했다. 감독과 선수, 팬들이 하나되어 봉사현장을 직접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한·일월드컵 10주년을 기념하고 K리그에 보내준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100여 명이 7개 조로 나누어 도배, 장판 교체, 싱크대 교체, 지붕 보수 등 다양한 작업에 팔을 걷어붙였다.
“보여지는 것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K리그의 마음과 작은 정성이 전달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황선홍 감독은 사랑의 집 고치기가 보여주기 위한 행사가 될까봐 유독 걱정했다. 사진을 찍을 때도 얼굴을 잘 들지 않았고 벽에 붙어 도배지를 꼼꼼히 바르는 데 집중했다.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일하다 이따금 창밖의 다른 집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는 “냉철한 승부의 세계에만 갇혀서 보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며 “월드컵 이후 받은 많은 사랑을 그라운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더 나누어야겠다”고 말했다.
‘도배의 신’임을 자처한 신태용(42·성남 일화천마) 감독은 재치있는 입담으로 현장 분위기를 밝게 했다. 황 감독이 “군말 말고 와서 일을 도와라”고 말하자 “형, 나도 감독이야, 이제”라며 애교 섞인 투정을 했다. 황 감독이 “신 감독 없으면 일이 안 돼”라고 하자 “고뤠∼?”라고 예능프로그램 유행어를 흉내 내며 달려왔다. 봉사에 참여한 여성 팬들은 얼짱 송진형(25·제주 유나이티드FC) 선수보다 신 감독이 더 좋다며 즐겁게 도배를 도왔다.
한국 축구의 대표 수문장 김병지(42·경남 FC)와 이운재(39·전남 드래곤즈) 선수도 골키퍼 장갑이 아닌 빨간 목장갑을 끼고 듬직한 모습을 보였다. 김 선수가 맡았던 집에 홀로 사는 이란자(68) 할머니는 “우리 영감이 살아 생전 축구를 좋아해 국가대표 경기만 있으면 TV 앞에 붙어 있었다. 꽁지머리를 한 김병지 선수를 제일 좋아했는데 이렇게 직접 집을 고쳐주니 너무 고맙다”며 김 선수의 손을 잡았다. 김 선수는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나 가슴이 아팠다”며 “부모님께 못해 드린 일을 오늘 다한다는 생각으로 할머님이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삽을 들고 시멘트와 물을 섞던 이운재 선수도 “이런 경험을 통해 선수 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는 것 같다”며 “은퇴를 앞두고 있는데 사랑해 주신 많은 분들을 위해 홍명보 감독의 백혈병돕기재단 활동과 같은 다양한 길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리그 차원의 봉사활동에 브라질 출신 모아시르(52·대구 FC) 감독은 감탄했다. 모아시르 감독은 “축구가 종교와 같은 브라질에서도 이런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며 “감독과 선수 그리고 팬들이 하나 되는 문화가 보기 좋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베트남 출신으로 다문화 가정을 이루고 있는 레티히엔(23) 씨는 “비용이 많이 들어서 집 보수를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이렇게 수리하게 돼 너무 좋다”며 깔끔해진 네 살배기 딸의 방에서 떠날 줄 몰랐다.
한편 이날 박경훈(51·제주 유나이티드FC) 감독, 김병지, 김상식, 유경렬(34·대구 FC) 선수들은 파주 율곡중학교 축구부 학생 30여 명을 대상으로 축구 클리닉을 열어 재능기부 활동도 함께 했다. 박 감독과 선수들은 “재능기부와 직접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경중을 따질 수 없이 모두 의미 있는 활동”이라며 “앞으로 구단에 돌아가서도 연고지 팬들과 이웃에게 받은 사랑을 최대한 돌려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주 = 김대종 기자 bigpaper@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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