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틸데 수녀는 45년간을 한결같이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지내왔다는 점에서 많은 후배 수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베르틸데 수녀는 45년간을 한결같이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지내왔다는 점에서 많은 후배 수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서울시 명예시민마리아 베르틸데 수녀유머러스하고 활달한 성격에 목소리가 유난히 큰 마리아 베르틸데(74·한국명 하명옥) 수녀. 지난해 서울시 명예시민이 된 그는 지난 1967년 독일에서 한국으로 파견된 후 45년간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 왔다. 또 몇몇 동료들과 함께 노트르담수녀회 한국관구 설립에도 주춧돌 역할을 했다. 그는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지금도 후배 수녀들의 실천교리 교육, 이주민을 위한 지원센터 설립과 운영 등을 의욕적으로 돕고 있다.

지난 16일 오후 2시 인천 계양구 계산2동 노트르담수녀회 본관 건물 1층 복도. 베르틸데 수녀는 지팡이를 사용하는 대신 소형 카트를 밀고 나타나서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사무실 안으로 안내했는데 사무실 중앙에는 대형 탁자 1개와 의자 3~4개가 자리잡고 있었다. 탁자 위는 온갖 로프 장식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으며 한쪽 벽면은 온통 종이상자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다리가 다소 불편해 보이기는 했지만 얼굴이 해맑고 천진난만한데다 목소리 톤이 높아 나이보다 무척 젊어 보였다.

베르틸데 수녀는 자리에 앉아 “내세울 게 없는데 수고스럽게 찾아와서 실망만 크겠다”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수도자의 입장에서 남을 돕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일 뿐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태도였다. 기자가 한국에 처음 파견됐을 때의 소회 등에 대해 거듭 묻자 그제야 오랫동안 간직했던 사진들을 꺼내놓고 지난 45년간 낯선 땅에서 겪었던 일을 조금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수녀가 되기 위해 1955년 수녀원으로 들어갔으며 1967년 29세 되던 해 알렉산드라, 보노자 등 다른 수녀 2명과 함께 낯선 땅 한국으로 파견됐다. 한국에 온 후 서울 계동 숙소에 거주하면서 동료 수녀들을 위한 식사 준비와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다가 1년 후부터는 한국어학교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이웃들의 비참한 생활에 눈을 뜬 것은 이때였다. 특히 버스 안내양들이 적은 보수, 열악한 주거 환경, 근무시간 초과, 비인간적인 대우 등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안내양들을 위해 송년잔치를 베푸는가 하면 주 2~3회씩 핸드볼, 뜨개질, 육아법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안내양들의 기숙사가 있는 숙소를 순회하기도 하고 그들을 수녀원으로 초대해 재봉틀을 이용해 양재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미아리를 지나는 8번, 9번, 26번, 84번 버스와 그때 도와준 안내양들의 얼굴이 생각난다”며 “그 당시 (소외된) 안내양들에게는 뭘 도와주는 것보다 시간을 내서 함께 어울려 주는 게 더 중요했다”고 말했다.

그는 산부인과 병원이 많지 않던 당시 달리는 택시 안에서 갓 태어난 어린 생명을 데려다 가난한 부모 대신 한 달여 동안 수원 목장에서 구한 오트밀과 보리차를 손수 먹여가며 돌보기도 했다.

베르틸데 수녀가 헐벗은 어린이들을 위해서 본격적으로 발벗고 나선 것은 부산으로 발령받은 1972년부터다. 그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시장 등에서 일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엄마를 대신해 하루 종일 아이들을 돌봐줄 유치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부민동 수녀원 응접실과 식당에 어린이 24명을 모아 돌봐주기 시작했다. 이 임시 유치원은 하루 2시간만 여는 다른 유치원들과는 달리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 이후까지 어린이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봐 주었다. 또 부모가 건강해야 자녀들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부모들의 질병 치료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이 임시 유치원은 지금은 5개반을 갖춘 정식 유치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부민동 유치원에서 규칙적으로 공부하는 습관을 들여준 결과, 1기 졸업생 가운데 미국 가서 박사를 따거나 의사가 되고 혹은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등 훌륭하게 성장한 학생들이 많아 가슴이 뿌듯합니다.”

부산 부민동에서 7년여간 유치원을 운영하고 다시 수도권으로 발령받은 그는 1979년부터 1989년 초까지는 서울, 오산, 부천 등으로 근무지를 옮겨 가며 젊은 수녀 양성을 책임진 수련장으로서, 이후 1992년까지는 수녀원장으로서 후진 양성과 선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또 지난 19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노트르담수녀회가 지체장애인 재활센터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그는 최근에는 다른 수녀 2명과 함께 노트르담 실천교리연구소에서 여러 상징물을 이용해 성서 테마를 전달하는 것을 골자로 한 실천교리를 교육하고 전파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봉고차를 몰고 서울과 부천을 오가면서 각 지역 성당과 중국, 인도 등 외국에서 온 수녀들에게 실천교리를 교육시키는가 하면 세미나 등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또 노트르담수녀회가 지난해부터 전남 곡성 등에 설립한 이주민센터의 운영을 위한 자금을 외부에서 후원받아 오는 등 이주민을 돕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홀로 사는 노인들과 병원을 찾아가지 못하는 가난한 환자들에게 의약품을 나눠주는 일도 계속 하고 있다.

베르틸데 수녀는 고향인 독일에는 3년에 한 번 입양아를 데리고 갈 때만 들른다. 그는 또 자신이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지구 어디라도 갈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현실적으로 나이가 들어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 가기는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한국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한국인이 다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1987년 독일의 한 병원에서 골반뼈 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한국어로 “물 좀 달라”고 말했는가 하면 주위 사람들에게는 한국인보다 더 노인과 연장자를 정성껏 모시는 예의바른 사람으로 각인돼 있다.

틈나는 대로 후배 수녀들의 낡은 스웨터 등을 꿰매 주고 봉고차를 몰고 나가면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기 바쁘다는 베르틸데 수녀. 그는 “나는 원래 노트르담수녀회를 국산으로 만들기 위해 독일에서 온 사람”이라며 “지금은 나 혼자 독일산이고 나머지는 다 국산이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인터뷰 = 이상원 부장대우(전국부)
인천 = ysw@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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