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팔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부동산 갑부였던 그는 주위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재산을 다 날리고 죽기 위해 수락산을 찾았었다. 이제 그는 그 수락산에서 식당을 하며 살고 있다. 지난 12일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수락산 자락의 등산로에 있는 박종팔이 운영하는 식당 ‘만남의 광장’에서 그를 만났다. 염색한 티가 났지만 여전한 상고머리에 30여 년 전 한창때의 얼굴과 변함이 없다. 기자의 명함을 받더니 고향과 나이를 묻는다. “와따 고향 선배님이네. 한 살 차이면 친구 뻘이라 했지만, 다른 동네는 몰라도 목포 그 동네서는 한 살 차이라도 형님 대접 안 하면 큰일 나라. 안 그렇소?”하며 명함에 메모를 한다. “이라고 안 하면 금방 잊어 부러서….” 중학교 때 가출해 서울 생활을 해왔지만 진한 남도 사투리는 여전하다.
박종팔의 인생은 초등학교 5년 때 돌아가신 어머니와 깊은 관련이 있다. 복싱 선수가 된 것도, 함께 산 여자들이 모두 연상인 것도 그렇다.
―복싱을 시작하게 된 연유는.
“전남 무안 북초등학교 5년 때 자궁암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우리 집이 50마지기 이상 하는 대농이었는데 목포, 광주, 서울을 오가며 병구완하느라 그 많던 농토가 뭉텅 없어졌어요. 어린 나이지만 속이 상합디다. 중 1년 때 새엄마가 들어오자 더욱 방황했어요. 당시는 김일 때문에 레슬링이 인기라 레슬링 선수가 돼 돈을 벌면 잃은 땅을 다시 찾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 가출해서 광주 작은 집에 있었는데 레슬링 도장을 못 찾아 광주고 앞에 있던 복싱도장(챔피언체육관)을 다녔어요. 그때만 해도 레슬링 생각이 많았든지 복싱은 체질이 아닌 것 같아 일곱 달 만에 집에 돌아갔죠. 그러다 곧 두 번째 가출을 했는데 당시 집에서 수확한 유채씨 다섯 가마니 중 두 가마를 들고 나와 헐값인 7000원씩에 팔아 학교(학다리)역에서 서울 가는 기차를 탔어요. 나보다 열 몇 살 많은 사촌형이 84번 버스(현재 151번) 흑석동 종점에서 철물점을 한다는 것만 알고 무작정 나선 것이죠. 해거름 참에 서울역에 도착했는데 그만 못 볼 것을 봤어요. 양철통에 물방개를 넣고 물방개가 들어가는 칸에 돈을 거는 도박에 빠져 남은 돈 만 몇천 원을 몽땅 잃었어요. 길을 물어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넜어요. 다리가 뭐 그리 긴 지, 한강이 바다가 아닌가 생각이 듭디다. 다행히 사촌형 집은 쉽게 찾아 철물점 일을 했어요. 근데 복싱하라는 게 운명이었던 것 같습디마. 내가 사촌형 집에 있다는 것을 안 아버지가 쌀을 부쳐줘서 형과 함께 영등포역으로 찾으러 갔어요. 그때 수산시장 삼거리에 있는 복싱도장 간판을 보게 됐죠. 다음 날 걸어서 찾아가 봤는데 김현치 관장이 하는 동아체육관이었어요.”
―인생 1라운드는 행운과 성공의 시대라고 했는데.
“딱딱 맞아 들어 가드라니까요. 사촌형이 이사 가게 돼 철물점을 그만두어야 하는데 마침 건너편 중국집 직원이 그만뒀어요. 그래서 중국집에 취직이 딱 됐어요. 운동할 시간 두 시간을 빼주고 대신 돈은 덜 받는 조건으로. 나중에 IBF 세계챔피언도 신설 단체라 슈퍼미들급 챔피언결정전에 바로 나갔고, WBA도 신설 체급이라 곧바로 결정전에 나가 벨트를 차지했으니까요. 복싱을 시작한 지 두어 달 만에 서울 아마추어 신인대회에 나갔고 이어 전국대회에도 나갔는데 두 번 다 동향(전남) 친구인 이효남에게 져 준우승했어요. 점수를 따지는 아마는 체질이 아닌가 보다 해서 1977년 11월26일 프로로 전향했지요. 부산에서 정용수와 4라운드짜리 데뷔전을 치렀는데 처음으로 ‘웃통’ 벗고 뛰는 경기였죠. 그때 아마추어는 헤드기어는 안 썼지만 메리야스는 입었으니까.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몸이 덜덜 떨리고 링이 운동장만 하게 보입디다. 관중들 얼굴도 전혀 보이지 않고. 이런 긴장감은 나중 동양타이틀을 차지하고도 한참 더 있고 나서야 없어집디다. 좌우간 소싸움 하듯 머리를 박고 펀치를 날렸는데 2라운드에서 갑자기 상대가 안 보입디다. 내 주먹이 얼마나 강했는지 전라도 말로 ‘우, 아래로 몇 번 홅어 불믄’ 다 나가떨어졌지요.”
―그러다 초창기에 된통 당했는데.
“데뷔전을 치른 직후 연말 MBC신인왕전에서 KO로 2연승을 거두고 우수선수상을 받으며 미들급 신인왕이 됐죠. 그때는 한·일 신인왕전이 있어 일본에 가 일본 신인왕과 대결했어요. 1라운드 27초, 그것도 첫 펀치에 상대가 누워버렸죠. 원래 일본에서 두 게임하기로 했는데 소문이 나서 상대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복싱이 참 쉽구먼 생각했어요. 6전 만에 강흥원 선배와 한국타이틀전을 가졌는데, 2라운드에서 KO패 당했죠. 힘만 믿고 온몸에 힘을 실어 한 방을 날렸는데 카운터에 걸렸어요. 정신이 없어 경기 끝난 지도 몰랐죠. 이 패배가 나를 챔피언으로 만든 겁니다. 철저한 준비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실감했죠. 권투가 뭔지 알게 된 것이죠. 이후 19연속 KO승을 거뒀지요.”
―5번의 패배 중 실력으로 도저히 안 되겠다 했던 게임은.
“물론 강흥원 선배와의 게임이었죠. 나머지 4패는 준비 부족. 그러니까 계체량 실패 때문이에요. 내 평상시 체중이 84∼86㎏이어서 체급에 맞추려면 13kg 감량은 기본이고 많게는 15㎏까지 뺐어요. 세계타이틀 같은 경우는 석 달간, 동양타이틀전은 두 달에 걸쳐 감량합니다. 사우나는 몸을 곯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아주 급할 때나 했지, 운동으로만 뺐어요. 사우나는 지금도 3분도 못 있어요. 신인 때 당한 1패를 빼면 ‘도저히 이길 수 없다’하는 생각이 들었던 그런 상대는 없었어요.”
―베네수엘라 선수 오벨메히아스에게는 두 번 다 졌는데, ‘천적’이라는 생각은 없었는지.
“할 만한 상대였을 뿐이죠. 1982년엔가 베네수엘라에 가서 논타이틀전을 했는데 KO패 당했죠. 고지대인 줄 아무도 모르고 갔는데 그냥 구름 위에 있는 것 같이 둥둥 뜬 기분입디다. 그러다 무력하게 쓰러지고 말았죠. 두 번째 대결은 1988년 수안보에서 열린 WBA 2차 방어전이었는데 7회 버팅을 당해 이빨 3개가 나갔어요. 당연히 중단시켜야 했는데 우리 코너에서 판단 실수한 것이죠. 얼굴에 살짝 맞아도 통증이 어마어마하게 와 12회까지 버티다 KO 당했어요. 나중에 결국 앞니 2개를 뺐죠. 나를 두 번이나 이겼지만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 안 해요.”
―세계타이틀방어전만 10번이나 했으니 돈도 많이 벌었겠네요.
“내 별명이 ‘돈팔이’ 아닙니까. 갈퀴로 긁었다니까요. 내가 어머니 병구완으로 없어진 집안 땅을 되찾으려고 운동을 시작했지 않습니까. ‘돈팔이’ 별명은 김현치 관장 때문에 붙은 것인데….”
당시 김 관장은 박종팔에게 “니가 열심히 하면 ‘돈팔이’ 될 거고 그렇지 않으면 ‘똥팔이’ 밖에 안 된다”고 했단다. 그게 별명이 됐다.
“동양챔피언 할 때인 1981년 당시 돈 3000만 원 주고 충남 당진에 반듯한 농지 1만 평을 샀어요. 돈만 벌면 땅에다 묻었지요. 무안 땅을 되사려고 했는데 그 자리에 이미 자동차학원과 공장이 들어서서 못 사서…. 그때 서울 변두리 주택이 한 채에 500만 원 했는데 동양타이틀전 하면 1500만 원에서 3000만 원 받았어요. 나는 경기 일정이 잡히면 먼저 부동산 계약부터 했다니까요. 명의는 다 아내 앞으로 해줬는데, 국세청 부동산 투기 단속에 걸렸어요. 국세청에 가서 ‘복싱선수는 김득구 같이 언제 죽을지 몰라 마누라 자식 먹고 살라고 마누라 명의로 사준 거다’고 해명했어요. 담당이 ‘이해가 된다며 운동이나 열심히 하라’면서 알아서 다 해결해줍디다.”
―좌절과 시련의 인생 2라운드 이야기나 들어보죠.
“은퇴하고 1994년 김현치 관장이 하던 동아프로모션을 인수했어요. 주위에서 ‘스승이 어려운데 니가 맡으라’고 해, 생각해보니 ‘스승과 제자’라는 그림이 그럴듯해 보여 1억5000만 원인가 주고 인수했죠. 몇 번은 잘했는데 최재원 선수 세계타이틀매치 전초전 때문에 사달이 났어요. 파벌 싸움이 있던 한국권투위원회에서 승인을 안 해줘요, 계체를 쌀집 저울로 했다는 이유로. 관중이 2500명 들어왔고, 생중계하기로 한 MBC까지 25분 전까지 기다렸는데 끝내 경기가 열리지 못했죠. 3억5000만 원이 날아갔어요. 열불이 나서 권투위원회와 국회사무실을 찾아가 때려 엎었죠. (‘구천서 씨가 당시 회장이었죠?’하고 묻자 그 양반 이름은 쓰지도 말라고 한다.) 그랬더니 4가지 죄목으로 고소해 집어넣습디다. 다행히 검사님이 복싱팬이라 선처해서 벌금 100만 원 받았어요. 구치소에서 37일 있었죠. 그 일이 있고 세상을 알아야겠다고 강남에 단란주점을 차렸는데, 이게 골로 가게 된 지름길이었어요. 나는 한 살이라도 위면 형님, 밑이면 동생하고 사는 데, 전부 사기꾼들만 몰려 왔어요. 특히 기획 부동산, ‘10억 원 투자하면 50억 원 번다’는 식으로 꼬드겨 혹해서 돈을 주면 다음 날부터 함흥차사여. 가진 게 부동산이라, 남에게 돈 빌려 줬지만 내 신용은 지켜야 하니까 집 팔아서 이자 갚고. 그 이자라는 게, 거기에 가드만. 마누라라도 모질게 했으면 됐을 텐데, 남편 오기를 아는지라 군소리 없이 땅문서 내주다 보니, 부동산 28건이 다 그렇게 날아갔어요. 천불이 납디다. 당뇨, 고혈압, 뇌졸중까지 찾아오고, 몸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땀에서 썩은 내가 나 사람이 옆에 오지 못할 정도였죠. 수락산에 올라 뛰어내려 죽을 자리를 5곳이나 물색해 놨어요. 내가 술을 먹었더라면 벌써 뛰어내렸을 거요. 그러고 있는데 누가 먼저 뛰어내립디다. 한참 방황하고 있을 때 마누라까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벌써 5년 됐네요.
―다 털어버리고 새 인생을 잦은 계기는.
“4년 전 아는 누님이 지금의 아내(이정희·56)를 소개해 재혼했어요. 나는 두 딸이 있고 이 사람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사별하고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뒀어요. 내 여자들은 다 나보다 두 살 위 연상인데 일찍 어머니를 여읜 때문인지 연상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새 장가들고서도 본전 생각이 나 또 5건이나 사기에 걸려 부인 돈 30여억 원을 날렸죠. 수락산 폭포 밑에 쉬러 왔다가 ‘건강도 나쁘니 내 땅에서 살며 휴양이라도 하라’는 지인의 도움으로 이곳에 정착하게 됐죠. 내가 잘 나가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지 않을까 생각하실지 몰라도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전에는 ‘돈만 잘 벌어다 주면 됐지’하는 생각이었는데 이제 가족, 가정이라는 게 뭔지 알았으니까요. 둘째 딸이 작년에 처음으로 생일 케이크 불을 꺼봤다고 할 정도로 가족과는 담을 쌓고 살았어요. 여기 만든다고 거의 개간하다시피 했어요. 처음엔 아예 쓰레기 밭입디다. 15t 트럭으로 18차례나 쓰레기를 치우고 흙을 새로 18차분을 받았어요. 이런 돌들도 다 내 손으로 쌓은 겁니다. 다시 땀을 흘리고 마음이 편안해 지니 ‘때깔’이 돌아오네요.”
인터뷰 = 이동윤 선임기자(체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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