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시인은 “북한산 자락인 정릉에서 산 지 벌써 34년이 됐다”며 “1주일에 두 번 정도 북한산을 찾는다”고 말했다.
신경림 시인은 “북한산 자락인 정릉에서 산 지 벌써 34년이 됐다”며 “1주일에 두 번 정도 북한산을 찾는다”고 말했다.
친손녀인 가윤(10·왼쪽) 양이 할아버지 신 시인과 이야기하고 있다.
친손녀인 가윤(10·왼쪽) 양이 할아버지 신 시인과 이야기하고 있다.
日서 작품집 출간 신경림 시인“술을 끊은 지 딱 5개월하고 21일이 됐네요. 지난해 12월30일 김근태 고문이 돌아가셔서 올해 1월1일 상가에서 술을 마신 게 마지막입니다. 그 이후로 술은 일절 입에 대지 않고 있어요.”

지난 21일 서울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만난 신경림(77) 시인은 술 끊은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농무(農舞)’의 시인이 술을 끊다니,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시 ‘농무’ 중에서)


인터뷰 = 김영번 차장(문화부)

시인의 첫 시집 ‘농무’가 1973년에 나왔으니 무려 40년의 세월이 지난 셈이다. 하지만 지금도 ‘농무’를 읊조리면 막 내린 시골 마을 가설무대와 파장을 맞은 장터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시에서처럼 시인은 늘상 술을 가까이하며 거친 세파를 헤쳐 왔다.

시인은 ‘왜 술을 끊었느냐’는 질문에 즉답을 하지 않고 “담배는 젊었을 때 끊었다”며 돌려 말했다. 술을 끊은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자면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부터 김 고문에 대한 추억까지 한참을 말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미뤄 짐작할 뿐이다.

―지난 5월 첫 동시집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실천문학사)를 냈는데.

“동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진작부터였다. 젊을 때 여러 편 쓰기도 했지만 이사를 다니면서 분실하고 말았다. 애써 보관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후에 쓸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손자가 생기면서 동시를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됐다. 서로 이웃해 살면서 손자와 만날 기회가 잦았다. 손자의 생각과 행동을 지켜보면서 이것을 형상화하면 훌륭한 문학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동시집엔 희수(喜壽)에 이른 노시인의 ‘아이 같은 마음’이 물씬 묻어 있다. 마치 노년엔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동심의 세계에 가까워진다는 속설을 증명하는 듯하다. 시인은 “시집에 수록된 동시들은 최근 6~7년 사이에 쓴 시들”이라며 “일반 시를 쓰는 마음과 똑같은 심정으로 동시를 썼다”고 했다. 동시라는 ‘틀’에 굳이 얽매이지 않고, 직접 듣고 본 아이들의 마음을 시에 담고 싶었다는 것이다.

시인은 올가을쯤 신작 시집을 낼 예정이다. 지난 2008년 출간한 시집 ‘낙타’가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이었으니 열한 번째 시집이 되는 셈이다. 시인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분량의 시집을 낸 것”이라며 “29일엔 일본에서 내 대표적인 시들을 모은 시선집 ‘낙타’가 출간된다”고 소개했다. 시인의 첫 시집 ‘농무’는 이미 지난 1977년 일본에서 완역본이 나왔다. 그만큼 일본에서도 신 시인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시집 ‘농무’로 화제를 돌렸다.

―첫 시집을 자비 출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 당시엔 유명 시인의 시집도 한정 출판하는 상황이었다. 자비로 500권을 찍었는데, 이마저도 다 팔리지 않아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시집을 건넸다. 하지만 점점 소문이 나고 서점에서 시집을 찾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 197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창비시선’ 첫 시집으로 ‘농무’를 펴냈다. 이후 ‘농무’는 10여 만 부 이상 팔려 나갔다.”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때는.

“중학교 3학년 때였다고 기억한다. 김영랑 시인의 ‘언덕에 바로 누워’를 읽고서 무척 감동받았다. 이 시를 읽고서 나도 뭔가 먼 데 있는 것, 먼 데 있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말하자면 내 가슴속에 뭔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 하는 걸 느꼈다. 이때 나도 할말이 있다는 생각으로 시를 써본 것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당시 좋아했던 시인이 있다면.

“이용악 시인이다. 광복 후 월북을 해서 한동안 잊어졌던 시인인데 민주화가 된 후 다시 우리 문학사에서 복권된 이다. 어릴 때 좋아했던 시 중에 이용악의 ‘북쪽’이란 시가 있다. 시를 읊자면,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르다’. 내가 이 시를 읽은 것은 고등학교 2, 3학년 무렵이다. 읽으면서 가슴속으로 찡하는 울림 같은 것을 받았다. 이걸 읽으면서 나는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곰곰 생각하게 됐다. 여인이 팔려가고, 외국한테도 쩔쩔매고, 가난하게 살고…. 이런 것을 깨닫게 해준 시가 바로 이용악의 ‘북쪽’이었다.”

신 시인은 충주고 시절 잊을 수 없는 은사를 만났다. 남한강과 책 읽기를 더 좋아했던 시인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어 시험지를 백지로 냈다. 당시 국어 교사는 문학평론가 유종호 전 연세대 교수의 부친 유촌 선생이었다. 그는 시 다섯 편을 써오는 것으로 벌을 대신했다. 그만큼 신 시인의 시적 재능을 알아보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신 시인은 일년 선배였던 유 전 교수와 만나 평생 우정을 지속하게 된다.

―등단은 언제, 어떻게 했나.

“1955년 동국대 영문과에 입학,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글쓰기와 너무 먼 학과 공부에 흥미를 잃어 학교 생활엔 소홀했다. 대학 2학년 때 시 ‘낮달’, ‘갈대’, ‘석상’ 등이 ‘문학예술’지에 추천돼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문단에 나와서 굉장히 실망한 것이 있다. 모두들 당대의 시만 읽을 뿐 십 년, 십오 년 전의 시는 잘 읽지 않는 것이었다. 당장 문예지에 발표돼 여러 평론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들만 읽고서 마치 그것이 문학의 전부인 것처럼 얘기를 하더라.”

―등단 이후 한때 문학을 거의 포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 1957년쯤인데 시를 쓸 마음도 안 생기고, 동료나 선배 문인들을 만나도 아무 재미가 없었다. 고향으로 낙향, 농사도 짓고 광산이나 공사장에 가서 일도 하고, 방물장수나 아편 거간꾼들을 따라 방랑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의 10년을 시골에 박혀서 살았는데, 그때 깨달은 것이 있다. 지금도 그것만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개인이며, 마지막 책임은 결국 자기 자신이 져야 한다. 하지만 남과 함께 살지 않는 삶이라는 건 이 세상에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사람은 남과 더불어 혼자 산다’는 것이다. 말이 이상하지만 이 ‘더불어 혼자’ 산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때 신 시인은 다시 시를 쓸 기회가 온다면 자기 혼자의 생각이나 뜻에만 매달리지 않고 더불어 사는 정서, 더불어 사는 아름다움, 더불어 사는 의미들을 시로써 표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신 시인이 다시 시를 쓰게 된 것은 1965년 김관식 시인을 충주 시내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김 시인은 술김에 “야, 서울에 올라가자”며 신 시인을 잡아끌었다.

―생활 터전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 워낙 돌발적으로 서울행을 결행해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였다. 당시 김 시인의 집이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있었는데, 산중턱에 무허가로 크게 집을 짓고 살고 있더라. 김 시인은 아내와 애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방 한 칸을 무조건 비워 주었다. ‘이 방은 앞으로 신경림이가 쓸 거니까 그렇게 알아라’며 공짜로 방을 내준 것이다. 그래서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됐다. 시골에 가서 아내를 데리고 올라와 그 집에 데려다 놓았는데 한심하더라. 김 시인이 우선 쌀을 다섯 말 주고 김치도 주고 해서 살림을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전, 신 시인이 시골 생활을 할 때도 그가 시를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다. 아편 거간꾼들을 따라다닐 때 일이다. 어느 해 겨울, “술을 좋아해서 주막에 들르면 일단 술 먼저 먹는 걸 생애 제일의 뜻으로 삼고 있을 때”였다. 그날도 한 주막에서 술에 잔뜩 취해 잤는데, 새벽에 일어나 뒷간에서 일을 보다 보니 하늘에 주먹만 한 별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한참 밑에 있는 공사장에선 불빛도 비쳤다. 갑자기 비감한 생각이 든 시인은 마음속으로 시를 썼다. 필기도구가 없다 보니 외우기만 했다. 이를 나중에 정리해서 발표한 것이 바로 ‘눈길’이라는 시다.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 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 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짓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 수제비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 때/ 아낙은 신세 타령을 늘어놓고/ 우리는 미친 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시 ‘눈길’ 전문).

거의 60년에 이르는 시력(詩歷)을 가진 신 시인에게 자신의 시 세계를 정리해 달라는, 어리석은 부탁을 해보았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아요.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의 현실에 침묵할 수는 없지만 그와 함께 나 자신에 대한 탐구도 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남들이 보고 만져도 못 느끼는 것을 느끼고, 표현해야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무 어려워 소통이 안 되는 시들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시를 안 읽는 시대라고들 하지만 외부적인 조건뿐 아니라 시인들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좋은 내용의 시를 썼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언어로’ 좋지 않으면 좋은 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zerokim@munhwa.com

관련기사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