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권여선(48) 씨가 자신의 네 번째 소설집 ‘비자나무 숲’(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모두 7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된 작품집은 ‘시간과 기억’에 대한 작가의 천착이 여전함을 보여준다. 인생의 갈피 속에서 쌓고 또 지워가는 기억과 망각의 깊이를 통해 삶의 심연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깊숙이 묻어놨던 기억을 깨우는 잔상들을 하나씩 좇아 힘겹게 불러낸다. 하지만 그 또한 실제 벌어졌던 ‘사건’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표제작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은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각각 애인의 죽음, 형의 죽음, 아들의 죽음을 겪은 세 인물의 만남을 다루고 있다. 죽은 이는 동일인이다. 즉 죽은 이의 애인과 동생과 엄마가 소설 속 주인공이다. 당연히 이들에게는 서로의 존재 자체가 아픔의 상기이고, 상처의 복기인 셈이다. 모처럼 자리를 함께한 이들은 투닥거리며 식사를 하고, 바람을 쐬러 비자나무 숲으로 향한다. 가는 도중 죽은 이를 추억하는 한 일화를 말하면서, 한여름 뙤약볕 아래를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세 사람은 웃음을 터뜨린다. 어쩌면 긴 시간 속에서 상처도 추억도 모두 그러안고, 살아 있는 한 웃을 수 있다는 인생의 또 다른 단면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소설은 마지막 장면에서 또 다른 반전을 시사한다.
단편 ‘은반지’에선 가느다란 은반지로 이어진 두 인물 사이의 오해와 증오를 통해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금욕적이고 베푸는 태도로 살아온 오 여사처럼 아무리 잘 살아왔다고 자부해도 인생은 의식조차 못 하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를 맺는다. 늘그막에 자신을 증오하는 한 사람을 대면하는 처절한 감정은 인생의 한 단면을 극대화해 보여준다. 또 다른 단편 ‘소녀의 기도’는 다른 수록작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제목이 주는 어감과는 전혀 다르게 폭력과 식욕과 성욕이 보다 직접적으로 버무려져 있다. 술에 취한 여고생을 강간하기 위해 집으로 납치해 온 강석호, 빚에 쪼들려 인질극에 동참하는 동거녀 김은혜, 구타와 폭행을 당하고 결국 죽음을 맞는 여자애가 소설 속 등장인물이다. 소설은 매우 역설적으로 끝맺는다. 목사인 아버지에게서 쫓겨나다시피 한 은혜가 석호를 ‘응징하려는’ 성녀(聖女)로 둔갑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또 다른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문학평론가 양윤의 씨는 “권여선의 소설은 비밀을 폭로하는 소설이 아니라, 비밀이 삶에 내재해 있음을 알려주는 소설”이라며 “소설 속 인물들은 들끓는 욕망의 힘으로 소멸의 지평선을 향해 나아간다”고 평했다.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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