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을 재촉하는 비로 캠퍼스가 촉촉이 젖어 있던 지난 25일,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연구실에서 만난 파우저 교수는 유창한 한국말 인사로 기자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통화만 여러 번 하다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네요. 길이 막히지는 않았나요?” 한국인과 다름없이 편안하게 손님을 대하는 그의 인사에 그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됐나요”라는 질문을 던지자 그에게서 준비된 답이 돌아왔다. “언어와 문화에 대한 관심 때문이에요.”
파우저 교수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언어에 대한 관심이 많고, 습득 속도도 빠르다고 소개했다. 그 나라의 문화를 먼저 이해한 후 언어를 배우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그는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호감으로 발전하고, 사람들과 친해지며 자연스럽게 언어를 익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일본어를 먼저 배운 후 한국어를 배우게 돼서 쉬웠어요.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한자어에서 나온 단어가 많고, 어순이 같기 때문이죠. 대학 다닐 때 주위에 한국 유학생들이 많았어요. 미국은 중국과도 1978년에 수교를 했지만 1980년대 초에는 미국에 중국 유학생이 별로 없었거든요. 한국 친구들과 떠듬떠듬 한국말을 하며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3년 한국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연일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이어졌고,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공사를 하고 있었다. 파우저 교수는 그런 한국의 상황이 조금 짜증스러웠지만 옛 모습과 새로운 모습이 혼재된 풍경이 독특하게 다가왔다고 회상했다.
“지하철역에서 항상 가방 검문을 당했어요. 메케한 최루가스도 많이 마셨고요. 그래도 외국인이라 별로 불편하지는 않았어요. 그때가 정말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옛 풍속이 남아있으면서도 새로운 문화와 조화를 이루며 발전해가는 모습이 흥미롭게 다가왔거든요. 지금은 옛것들이 모두 사라져서 많이 아쉬워요. 또 한국인의 다혈질적인 모습도 신기했어요(웃음). 당시 친구들과 종로에서 많이 놀았어요. 강남은 강남역 부근만 번화했고, 다른 동네는 썰렁했으니까요. 또 신촌에도 자주 갔어요.”
그는 자신이 만난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많이 달라요. 일본인은 형식적인 친절함이 몸에 배어있지만 잔정이 없어요. 반면 한국인은 여유가 있고 따뜻해서 쉽게 다가갈 수 있고요.”
미국으로 돌아가 미시간대에서 언어학 석사학위를 받은 파우저 교수는 1986년 두 번째 한국행을 선택했다. 친구의 소개로 육군종합행정학교와 카이스트, 고려대 등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7년간 한국에서 생활했다.
“육군종합행정학교에서 초급장교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어요. 군인들과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집중적으로 영어를 교육할 수 있었어요. 그런 교육방식이 좋은 경험이었어요. 카이스트에서도 초빙강사로 활동하다 고려대 영어교육과에서 처음으로 계약직 전임강사가 됐죠.”
하지만 그의 ‘언어 방랑벽’이 다시 도졌다. 그는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제3외국어 과정 전문가를 찾아 아일랜드 트리니티대로 갔고, ‘사회 언어학의 전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일랜드는 영어를 쓰는 나라지만 민족주의적 이유 때문에 아일랜드어를 필수로 배워야 해요. 거기다 유럽연합(EU)이 출범하며 불어와 독어 배우기 열풍까지 불었죠. 저는 이미 모어가 있는 상황에서 제2외국어를 배운 후 또 하나의 외국어를 배울 때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이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었어요. 아일랜드는 그런 연구를 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췄고, 문법적인 영향 등 여러 관점에서 다양한 연구를 할 수 있었어요.”
그러고는 바로 일본으로 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파우저 교수는 교토대 등에서 영어와 일본어를 가르쳤고, 일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등 13년간 일본에서 머물렀다. 그는 특히 2006년 가고시마(鹿兒島)대에 교양한국어 과정을 처음 만든 일을 의미있게 소개했다.
“교토대를 비롯해 이 학교 저 학교 다니며 교양영어를 가르쳤어요. 그러다 가고시마대에서 교양한국어 과정을 신설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고, 바로 달려가서 커리큘럼을 만들고 전임강사를 뽑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어요. 그 학교에서 신입생들을 위한 한국어 설명서를 써달라고 했는데 참 난처했어요. 일본에는 조총련계 학생들도 있는데 한국의 남북 분단 상황을 어떻게 써야할지, 또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정말 난감했어요. 고민하다 결국 중립적인 표현으로 적절하게 썼어요. 미국인인 제가 일본에 가서 한국의 분단 현실과 한·일 관계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 거죠(웃음).”
파우저 교수가 2008년 서울대로 오게 된 데는 한국의 국제화가 한몫을 했다. 서울대는 50개 정도의 외국인 교수 자리를 마련했고,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제2외국어 교수법 담당 교수가 필요했던 국어교육과에서 파우저 교수를 초청했다. 그가 외국인으로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한국 문화와 한국과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까지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일어와 영어 등을 통해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한국어 교수법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적임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서울대 국어교육과에 외국인 유학생들이 많이 있어요. 아마 서울대에서 두 번째로 외국인 학생이 많은 과일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필요했던 거죠. 한국인이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게 생각보다 어렵거든요. 일본에서도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어느 정도 일본화돼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서울대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잠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그러다 ‘학문이 자연스럽게 발전될 수 있는 쪽으로 가자’고 결정하고 한국으로 왔어요.”
그럼에도 파우저 교수가 서울대 국어교육과에 온 이유에 대해 처음에는 다들 의아해했다. 미국인이 국어교육과에, 그것도 한국어 교수법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학생들도 신기하게 반응했다.
“학생들이 처음에는 신기해했지만 제 수업이 재미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강의를 들으러 많이 왔어요. 제가 지도하는 학생들 중에 일본인 유학생이 많이 있어요. 제가 한국어, 영어, 일어를 섞어 쓰며 수업을 하거든요. 영어로 강의하다 학생들이 조금 어려워하는 것 같으면 바로 한국어로 바꾸고, 그러다 일본 학생들이 힘들어하면 일본어로도 하고요. 지난 학기 석사과정 논문수업에는 한국 학생이 한 명도 없었어요. 외국인 교수와 외국인 학생들이 모여 한국어로 수업하는 진풍경이 연출됐죠. 재미있는 건 학생들이 한국어가 서툴다 보니 간접적인 표현을 잘 못써요. 그냥 직설화법으로 던지는 거죠(웃음).”
한국인을 좋아하고,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누구보다 높은 파우저 교수지만 한국인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바로 남을 의식하고, 남의 얘기를 하기 좋아하는 습성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되는데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해요. 예를 들자면 동네 뒷산에 가면서도 엄청난 등산장비를 갖추는 거요. 남이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개성 없어 보여요. 또 남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많아요. 얼마전에 제가 카페에서 여기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걸 본 제 친구들이 ‘카페에서 여자와 있었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어쩌라고요(웃음). 그래도 젊은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추진력도 강한 것 같아요. 그래서 10년쯤 지나면 한국 사회도 많이 달라질 것 같아요. 희망적이죠.”
그는 언론매체와의 인터뷰 때마다 ‘꿈이 없다’고 말해왔다. 한 가지 일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 꿈이 생겼다. 바로 현장에서 체험하며 한국어를 배우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다. 한옥을 좋아하는 그는 커뮤니티 이름도 이미 ‘더 한옥’으로 지어놨다.
“외국인들이 한국의 문화를 체험하며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체험형 교육’을 하려고 해요. ‘김장’을 책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한국 아주머니와 함께 김장을 담그며 한국어를 습득하는 거죠. 또 문화재 답사도 가고, 요리도 배우면서 한국인들과 소통하게 하는 거예요. 문제는 운영 방법인데 사회적기업 형태로 만들지 아니면 법인을 설립할지 생각 중이에요.”
파우저 교수가 한 잡지에 기고한 글 중에 1980년대 인기를 끌었던 록그룹 토킹 헤즈의 ‘원스 인 어 라이프타임(Once in a Lifetime)’ 가사를 인용한 대목이 있다. “넌 어쩌면 다른 세상에 가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야. 그러면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겠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거지?’라고”. 파우저 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이제는 한국에서 오래 살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이 왜 새로운 세상에 와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답하는 그의 모습에서 행복감을 엿볼 수 있었다.
인터뷰=김구철 차장(전국부) kc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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