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준 / 논설위원

최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보드카 가격을 잡으라”는 특명을 내린 것을 계기로 보드카가 다시 한 번 세계적 관심을 끌고 있다. 경제 위기 와중에 보드카 가격이 급등하자, 자칫 정권위기로 연결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만큼 보드카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사랑은 각별하다. 표면상 가격은 잡혔다. 그러나 보드카가 매장에서 사라지고 밀거래되는 구(舊)소련 말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정통 러시아 보드카는 40도다. 가장 이상적인 보드카 도수가 몇 도냐는 차르(러시아 황제)의 질문에, 주기율표를 만든 세계적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40도라고 대답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보드카에 맥주를 섞은 ‘요르시’란 폭탄주도 있다. 요르시는 볼가강에 사는 물고기 이름이다. 이 물고기 가시에 찔리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아픈데, 그 정도로 혼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러시아인들은 요르시보다는 보드카 스트레이트를 선호한다. 요르시는 부족한 보드카에 맥주를 섞어 양을 늘려 마시려는 고육책에서 나왔다. 보드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 소련군의 주요 군수품이 됐다. ‘돌격 정량 100g’ 보드카를 전투 직전의 병사들에게 나눠줬다. 너무 취하지 않고 적당히 알딸딸한 느낌 속에서 돌격할 수 있도록 고안됐다.

고르바초프 체제 붕괴 원인 중 하나로 보드카 공급 부족을 꼽는 학자들도 있다. 술을 안 마시는 고르바초프는 음주로 인한 노동생산성 악화를 우려, 보드카 공급을 대폭 줄였다. 성인 1인당 한 달에 보드카 1병만 배급했다. 당시 ‘보드카 탈론’이라 불린 배급표는 암시장의 주요 품목의 하나였으며, 루블화 대용으로도 사용됐다.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은 공산주의(유토피아)를 취기 속에서나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인데, 보드카 공급이 실패하니 대중이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공산주의가 별건가. 보드카 한잔하면 오는 거지”란 유행가 가사도 있었다.

필자는 1992년 1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리테라투라 카페에서 그 도시 부시장이던 푸틴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푸틴은 “러시아인에게 보드카는 조강지처처럼, 다른 술을 마시다가도 결국은 돌아가게 되는 술”이라고 했다. 그런데 푸틴은 31년간 동고동락해온 류드밀라와 지난해 4월 이혼했다. 조강지처는 버려도 보드카는 내버릴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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