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평 / 논설위원

“국내에 잉여자본이 많다. 자본투자율을 다시 올리려면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수도권 규제를 완화하고 두 곳의 한강 수계와 관련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 권오규 전 경제부총리가 몇 달 전 출간된 ‘대한민국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보수·진보 원로들을 찾아 고견을 듣고 책으로 엮은 이는 이광재 전 강원지사다. 한덕수 한국무역협회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시급히 고쳐야 할 대표적 규제로 수도권정비계획법(수정법)을 꼽았다. “수도권을 개발하지 못하게 묶어 놓으니까 수도권이 엉망이 됐다. 경쟁을 하게 되면 높은 부가가치산업이 남고 다른 산업들은 전국에 흩어져 전국이 골고루 발전하게 된다.”

이들 3인은 노무현정부에서 정책을 총괄한 공통점이 있다. 한 회장은 경제부총리·국무총리를 역임했고, 권 전 부총리는 청와대 정책수석·경제수석·정책실장을 거쳐 한 회장 후임의 경제정책 수장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의 핵심 참모였던 이 전 지사는 국가 정책을 실시간 점검하는 국정상황실장을 지냈다. 이들을 통해 수도권 해금(解禁) 얘기를 듣는 건 놀랍다. 균형발전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은 노정부는 수도권과 지방을 대립 구도로 설정하고 수도권 자원을 강제로 분산시켰다. 행정복합도시·혁신도시·기업도시 이름을 단 ‘수도권 비우기’ 프로젝트로 수도권은 더 황폐해졌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이런 균형발전 정책을 기획하고 주도한 이들의 수도권 규제 완화론이어서 시사하는 바 크다.

1982년 제정된 수정법 등은 과밀억제·성장억제·자연보호 권역, 군사보호구역, 개발제한구역, 상수도보호구역 등 12개 중첩 규제로 수도권을 꽁꽁 묶어왔다. 기업 신규 투자도, 생산라인 증설도, 대학·연구소 설립도 어느 것 하나 맘대로 되는 게 없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은 투자 호재를 만나고도 포기하기 일쑤고, 어렵게 구한 부지를 창고로 쓰거나, 막대한 비용을 들여 공장을 이전하는 실정이다. 30년 이상 규제감옥으로 수도권의 성장 엔진은 식어버린 지 오래다.

수도권 규제 논리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첫째, 산업구조가 자본·지식 집약적으로 바뀌면서 제조업은 더 이상 인구집중 유발 요인이 아니다. 그러잖아도 저출산으로 수도권 인구 억제 취지가 퇴색하는 중이다. KTX로 서울∼부산이 2시간대 생활권이 된 마당에 수도권과 지방 구분도 무의미해지고 있다. 둘째, 수도권을 묶으면 기업 투자는 지방이 아니라 외국으로 향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수도권 억제 정책이 타 지역 경제성장으로 이어진 사례는 거의 없다”고 정리한 바 있다. 낡은 도그마가 양질의 일자리까지 밖으로 내쫓는 셈이다. 셋째, 수도권을 국가경쟁력의 거점으로 삼는 것이 글로벌 흐름이다. 1970년대부터 수도권 억제 정책을 썼던 영국·프랑스·일본 등은 이를 폐기하고 수도권에 자원을 집중시키는 쪽으로 선회했다. 21세기는 뉴욕·도쿄(東京)·상하이(上海)·런던 등 국가대표 도시끼리 경쟁하는 시대다.

노정부의 역주행을 지켜봤던 이명박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수도권 규제 완화에 나섰다. 수정법 시행령을 고쳐 신증설 제한을 일부 풀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비수도권 지자체와 정치인들의 거센 반발에 밀려 흐지부지된 것이다. 공은 박근혜정부로 넘어왔다. 마침 박 대통령이 ‘규제 기요틴’ 기치를 들고 규제와의 일전을 진두지휘하는 중이다. 그런데 수도권 규제에 관한 한 미심쩍은 기류가 감지된다. 안종범 경제수석은 연초 ‘규제개혁 시즌 2’를 예고하면서도 수도권 규제는 “올해 계속 논의할 예정”이라고 한 발 뺐다. 지난해에도 ‘추가 검토’로 분류해 규제 완화에서 빼놓았던 박정부다.

박 대통령은 규제가 ‘암 덩어리’ ‘쳐부술 원수’라고 과하다 싶은 레토릭을 구사했지만, 정작 수도권 규제에 관해선 언급한 기억이 없다. 지난 대선 공약에도 없었다. 세종시를 관철한 ‘원죄’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유가 어쨌든 위에서 모호한 태도를 보이면 일선 공무원이 앞서 움직일 리 없다. 인적·물적 자원을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최적화하는 것이 탈(脫)규제의 목적이라면 수도권 해금은 가장 절실하다. 세종시가 10년 만에 공식 완공한 지금 시점이 오히려 수도권 규제 혁파를 얘기할 때다. 박 대통령이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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