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으로 대부분 건물이 불타버려서 인조 때에 중창했다.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대웅보전도 그때 세워졌다. 대웅보전과 법당 안의 후불벽화, 꽃살문 외에도 고려동종, 법화경 절본사본, 영산회괘불탱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내소사에는 숱한 전설이 전해져 온다. 특히 전설이 단순히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눈앞에 증거를 들이밀기 때문에 하나씩 확인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대웅보전을 중수할 때 이야기다. 어찌된 일인지 대목은 3년 동안 목재를 베어오고 다듬는 일만 계속하였다. 집은 지을 생각도 없이 기둥, 서까래와 나무토막만 자꾸 깎아 놓자 어느 날 사미승이 장난삼아 나무토막 하나를 슬쩍 감췄다. 나무 깎기가 끝나는 날 나무토막을 세어본 대목은 하나가 부족한 것을 발견하고 주지 스님에게 자신은 대웅전을 지을 자격이 못된다고 집짓기를 고사했다. 주지스님의 권유로 대웅전을 세우기 시작했지만 끝내 나무토막 하나가 빠진 채 완성되었다.
또 하나의 전설 역시 대웅전과 관련된 것이다. 법당이 다 세워진 뒤 단청을 하러 들어가면서 화공은 “모두 끝날 때까지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한 달이 다 되도록 화공이 나오지 않자 궁금해진 스님이 살짝 문을 열었다. 한데, 화공은 오간데 없고 오색영롱한 새(관음조)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스님을 보더니 피를 토하며 날아가 버리더란다. 단청 한 곳을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채.
약속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과도한 호기심을 경계하기 위해 내려오는 전설일 것이다. 하지만 교훈보다 재미있는 것은 전설의 ‘증거’들을 현장에서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것이다. 대웅보전 천장에는 실제로 나무토막이 빠져 구멍만 남은 자리가 있다.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곳 근처다. 오른쪽 벽 한 곳에는 단청이 비어있다. 대웅전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으면 상주하는 ‘법당보살’에게 설명을 청하면 자세히 이야기해준다.
개암사는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해 이곳에 도성을 쌓은 뒤 전각을 짓고 동쪽을 묘암, 서쪽을 개암이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조선 중기 대표적 건물이다. 높이가 13m가 넘는 영산회괘불탱은 보물 1269호로 지정됐다.
매창은 1573년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열여섯에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렸다. 평범한 기생으로 살다갔을지도 모르는 매창의 일생을 파란만장하게 만든 것은 ‘사랑’이었다. 기생이 된 지 2년, 열여덟 살 되던 해 한양에서 유회경이라는 이가 부안까지 놀러온다. 그는 한양에서 이름을 날리는 문인이었다. 매창보다 스물여덟 살 많은 유부남이었지만 그들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꿈 같은 시간을 보내고 유회경이 한양으로 돌아간 뒤 바로 임진왜란이 터졌고, 그는 의병이 되어 전쟁터로 나갔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15년 만이었다. 매창은 그 사이에 잠시도 유회경을 놓지 못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구구절절한 시가 바로 그 증거다.
하지만 재회는 짧았다. 부안에 들렀던 유회경이 바로 한양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매창은 그 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서 3년 뒤인 1610년, 서른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부안의 사당패와 아전들이 외롭게 죽은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여 지금의 매창공원에 묻어주었고, 나무꾼들이 벌초를 하며 돌봤다고 한다. 그 뜻은 계속 이어져서 지금도 부안 사람들이 매창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개암사에서 발간한 ‘매창집’은 간송문고와 하버드대 도서관 등에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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