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130여㏊ 수원 화성 면적과 비슷하다. 산자락 안에 자리잡은 자작나무 숲은 겨울 눈과 어우러져 천혜의 은빛 세계를 펼친다. 김낙중 기자 sanjoong@munhwa.com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 자리를 삼가, 구중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 공주 (樹中公主)이던가!’정비석은 기행수필 산정무한(山情無限)에서 자작나무를 나무 중의 공주로 표현했다. 하나의 나무에 보내는 찬사가 이보다 더 극진할 수 있을까. 그뿐 아니다. 자작나무는 순수의 상징으로, 신목(神木)으로, 숲의 여왕으로 불리며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추운 곳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는 금강산 이북의 고지대에서 주로 자란다. 하지만 남한에서도 그리 낯선 나무는 아니다. 강원도 사람들이 나무를 하러 갈 때 불렀다는 ‘나무 타령’에도 자작나무가 등장한다. 그를 뒷받침하듯 태백, 횡성, 인제 등 강원도 산간 지방에는 곳곳에 자작나무 군락지가 있다. 물론 상당수는 인공 조림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는 국내 최고의 자작나무 군락지로 꼽힌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무릎까지 차는 눈밭이 펼쳐져 있다. 곰배령을 훝으며 넘어가는 강한 바람은 눈밭에 결을 만들고 눈보라를 일으키기도 한다. 김낙중 기자 sanjoong@munhwa.com
#원대리 자작나무 숲으로 가기 위해서는 ‘원대 산림감시초소’를 찾으면 된다. 주소로는 ‘인제읍 원대리 산 75-22번지’다. 초소에서 방명록을 작성한 뒤 3㎞ 남짓한 임도를 따라 걸어 올라간다.
길은 비교적 평평하고 부드럽게 이어져서 누구나 무리 없이 올라갈 수 있다.
어느 때인들 그 아름다움이 덜할까만, 자작나무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은 역시 겨울이다. 눈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흰 자태를 드러낸 자작나무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한다. 위로 올라갈수록 자작나무와 흰 눈은 서로를 닮아간다. 같은 색끼리 이뤄지는 오묘한 조화라니. 길은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조금 단조롭지만 길가의 나무들과 나누는 대화로 심심할 틈이 없다.
조금 가파른 길을 지나 언덕 위로 올라서니 바람이 거세다. 거대한 숲이 파도처럼 ‘쏴아 쏴아’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숨이 조금 가빠질 무렵, 하얀 물결이 안길 듯 다가선다. 드디어 자작나무숲이다. 아! 누군들 감탄사를 아낄 수 있으랴. 수해(樹海)라더니 말 그대로 나무의 바다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청순? 고결? 신비?… 뭔가 부족해 보이는 단어들만 머릿속을 빠르게 스친다. 숲이 환하게 불을 켜 들고 먼 길을 걸어온 사람을 반기는 것 같다. 바라보는 이들의 가슴에도 등불이 하나씩 걸린다. 하늘에 손이라도 뻗을 듯 늘씬한 자태로 서 있는 나신들. 세상에 가장 강렬한 색이 흰색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배운다.
천천히 숲으로 들어간다. 그 한가운데 서니 영화 닥터 지바고의 장면들이, 누군가 준비해둔 영상처럼 하나씩 스치고 지나간다. 끊임없이 펼쳐진 설원 위의 자작나무들. 순백으로 그려지는 주인공들의 애절한 사랑. 장면 하나하나는 여전히 강렬한 그림으로 남아있다. 잠시 서서 주인공들이 감내해야 했던 유배의 시간을 생각해 본다. 이곳에서는 유배라는 단어조차도 그리움이 된다.
숲길을 걷다 보면 동화의 나라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디선가 하얀 요정이 튀어나와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지 않다. 이곳에는 자작나무 코스(0.9㎞), 치유 코스(1.5㎞), 탐험 코스(1.1㎞) 등 세 개의 산책코스가 마련돼 있다. 어느 길을 택해도 나무들의 향연이다. 먼저 지나간 사람이 내놓은 길로만 다닐 건 없다. 널따랗게 펼쳐진 숲은 발길의 방향에 제약을 주지 않는다. 눈에 푹푹 빠지기도 하면서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속세는 아득히 멀고 낯선 공간에서 혼자 누리는 행복이 온몸을 감싼다.
자작나무숲을 벗어나면 산뽕나무, 들메나무, 신갈나무 등 활엽수들이 기다리고 있다. 한쪽에는 소나무 숲도 있다. 나무라고 영역 다툼을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숲의 질서와 평화는 견고하다. 걸음이 자꾸 가벼워진다. 하얀 나무와 눈이 지우개가 돼서 잡념들을 쓱쓱 지워나간다.
관광객들이 자작나무 숲 속에서 그네를 타며 동심을 즐기고 있다.
#곰배령이라고 하면 ‘천상의 화원’이라는 말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꽃피는 곰배령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눈이 쌓인 겨울에는 겨울대로의 깊은 맛이 있다. 세파에 얼룩진 마음을 하얗게 빨아 널고 싶은 사람은 곰배령으로 갈 일이다.
산행은 설피밭 삼거리에서 시작한다. 생태탐방안내소에서 신분을 확인하고 조금 올라가면 눈길이 시작된다. 곰배령까지는 왕복 10㎞. 네 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강선마을까지는 오르막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만하다. 하지만 눈이 많아서 아이젠은 필수다.
어디를 둘러봐도 눈, 눈이다. 눈 속에서는 이곳과 저곳의 분별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어쩌면 우리가 지고 가는 고통의 상당량은 스스로 그어놓은 경계 때문에 생겼는지도 모른다. 곱게 늙은 활엽수 사이로 겨울 햇살이 비켜 내린다. 20분쯤 지나면 옛날 화전민들이 살았다는 강선마을이 나온다.
길은 머리나 꼬리를 완전히 감추는 법이 없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이런 길에서는 시계가 아닌 나만의 시간과 함께 걸어야 한다. 자신이 시간을 지휘하지 못하고 시계에 쫓겨 다니는 삶은 불행하다. 속도를 내려놓는 순간 온전한 모습의 풍경이 나타난다. 지나가는 바람에 원시림처럼 깊은 숲이 뭉툭하게 운다. 얼음이 두꺼운 내에는 중간중간 구멍이 뚫려 냇물이 숨을 쉬고 있다. 생명의 숨구멍이고 생명의 물이다. 숲에서 그곳까지 발자국이 점점점 찍혀 있다. 눈이 그친 새벽, 숲에 기대 사는 누군가가 물을 마시러 다녀간 것이다.
나무들은 죽은 듯 고요하게 서 있지만 숨결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지금은 기다림의 시간일 뿐이다. 갈무리해둔 생명을 잎으로 혹은 꽃으로 힘차게 내밀 순간을 기억한다. 오래지 않아 쌓인 눈을 밀어 제치고 새싹들이 솟아오를 것이다.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길은 조금씩 가팔라진다. 기온 역시 급격하게 떨어진다. 빈 나뭇가지마다 상고대가 피어나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어느 순간 파란 하늘이 활짝 열린다. 곰배령이다. 꽃을 지천으로 품었던 화원은 지금 바람이 차지하고 있다. 바람이 달려오는 방향을 향해 선다. 가슴이 활짝 열리면서 알지 못할 기운이 전신을 감싼다. 그 기운에 샤워라도 하듯 나를 씻어낸다. 저만치 설악의 봉우리들이 도열해 있다. 워낙 춥고 바람이 거세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장갑을 벗으니 손이 금세 꽁꽁 언다. 이곳은 어쩌면 인간의 영역이 아닐지도 모른다. 못 이기는 척 걸음을 돌린다.
조금 내려오니 언제 얼었느냐는 듯 몸이 풀린다. 터무니없는 행복감이 밀려온다. 아파보지 않은 자는 건강한 날의 고마움을 모른다는 말을 실감한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걸음도 가볍다. 무엇을 찾기라도 하듯 여기저기 자꾸 둘러본다. 저 아래에서 지고 온 번뇌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밖에 가볼 만한 곳 = 인제에는 곳곳에 박물관, 문학관 등이 있다. 대표적인 곳이 만해마을에 있는 한국시집박물관. 우리나라 시의 이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곳은, 시인과 소장가들이 기증한 시집 1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1950년대 이전에 간행된 희귀시집도 100여 권 있다.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은 사라져 가는 산골 마을의 풍습과 농가의 세시풍습 등을 체계적으로 전시해놓았다. 특히, 뗏목 만들기, 목기구 제작, 목청 체취, 지당 모시기, 숯 굽기 등은 산골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산촌민속박물관 바로 곁에 있는 박인환문학관은 인제가 고향인 박인환 시인의 행적에 맞춰 명동거리를 재현해놓았다. 시인들의 아지트였던 ‘마리서사’, 선술집 ‘유명옥’과 ‘봉선화 다방’ 등을 돌아보며 옛 문인들의 자취를 되새겨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