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충신 / 정치부 부장대우

“남은 북에 비해 ‘슈퍼갑’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북쪽의 말 한마디에 발끈하지 말고, 대인답게 통 큰 양보도 해야 한다.” 진보인사도 아닌 개신교계 대표적 보수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영훈 대표회장이 신년 기자간담회 때 한 이 발언이 남북관계가 냉온탕을 오가는 을미년에 새삼 주목받고 있다.

종교계 인사의 인도주의적 발언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인다운 통 큰 양보가 이른바 북한이 대화 조건으로 내건, 한·미연합군사훈련 중지 또는 5·24 대북제재 조치 해제 요구안을 수용하라는 의미라면 선뜻 납득하기 힘들다. 전제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경제력 측면만 보면 당연히 한국은 슈퍼갑이다. 2014 국방백서는, 2013년 기준으로 한국은 북한에 비해 명목 국민총소득(GNI) 42.6배, 1인당 GNI 20.8배, 무역 총액 146.5배, 인구 2배의 통계수치를 내놓고 있다. 격차도 해마다 벌어지고 있다.

경제력만 보고 한국을 슈퍼갑이라고 단정하는 건 이만저만한 착시현상이 아니다. 군사·안보적 측면을 들여다보면 한국은 슈퍼갑은커녕 슈퍼을의 처지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국지도발 횟수가 2013년 29회에서 2014년 45회로 증가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력 양성에 10년 세월이 걸리는 특수전부대원 규모 역시 북한이 20여만 명으로 한국(2만여 명)의 10배다. 북한군이 매년 한국군의 3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국방예산을 투입하고도 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했다며 수시로 국지도발을 자행하는 배경은 특수전부대와 더불어 실전배치를 눈앞에 둔 핵미사일, 생화학무기, 6000여 명 규모의 사이버 전사 등 비대칭전력에서 한국군을 훨씬 앞서 있기 때문이다.

한민구 국방장관이 19일 업무보고에서 북한의 핵·대량파괴무기(WMD) 등 비대칭전력에 맞서 ‘도약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민·군 첨단 기술을 총동원해 레이저빔 무기와 같은 미래형 무기 등 역(逆)비대칭전력 개발에 나서겠다고 밝힌 것은 만시지탄이다. 미국 등 군사 선진국이 10∼20년 전에 군사력 건설 방향으로 제시한 지·해·공·우주·사이버 등 5세대 미래전쟁 영역 개념을 예산배정이나 목표연도 설정도 없이 급조한 감이 없지 않다. 박근혜정부 중반기에 ‘창조국방’ 개념을 들춰낸 것도 순발력에서 한참 떨어진다는 평가다.

북한이 한국에 슈퍼갑 노릇을 하는 것은 순전히 배짱 때문만은 아니다. 주민들을 굶겨 죽여가면서까지 일사불란한 목표 아래 건설한 비대칭전력에 맞설 현실적 대안을 아직 한국군이 마련하지 못한 사실을 북한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에 쏟아부은 비용이 약 2조 원인 데 비해 이에 대응하기 위해 투입할 비용은 27조 원으로 13배 이상이다. 잃을 게 적은 북한이 내건 조건은, 손해 보기 싫으면 ‘부자 몸조심’하라는 협박과 다름없다. 진짜 ‘통 큰 양보’는 북한의 비대칭전력을 무력화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역비대칭전력을 갖춘 뒤에나 가능하다. 갑질이 체질화된 북한에 대한 착각과 헛발질이 더 이상 용납돼선 안 된다.

csjung@munhwa.com
정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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