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선 / 문화부장

한·일 수교 40주년이었던 지난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는 한국에서 시를 읊었다. 한·일 정상회담을 마친 후 기자회견 자리였다. ‘절실한 소원이/ 나에겐 하나 있지./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라는.(切實な/望みが一つ/吾れにあり/諍いのなき/國と國なれ)’ 일본 단시의 명인인 한국인 시인 손호연(1922∼2003) 씨의 작품이었다.

고이즈미 총리의 시 낭송은, 일본어로 시를 써 일본에서 크게 인정을 받은 한국인 시인의 존재를 드러내 주었다. 그러나 그뿐, 한·일 양국의 화해를 바란 시인의 소망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신사참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바람에 역사 문제를 다룬 한·일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탓이다. 고이즈미 측은 외교적 수사로 시를 이용한 셈이다. 평소 손 씨의 작품을 아껴온 마니아로서 저들의 이물스러운 속내가 징글맞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그로부터 10년, 한·일 관계는 경색 국면을 지속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군 위안부, 독도 문제 등에서 우익 노선을 고수하고 있고 우리 정부가 원칙적으로 강경 대응을 하고 있는 탓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3년 차인데도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번도 갖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한·일 관계가 수교 50년 사상 최악의 상황이라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동북아의 정세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한·일 갈등의 지속은 이 지역의 평화에 큰 위험 요소가 된다. 최근 한·일 양국 지식인 20여 명은 이 상황을 타개할 방안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했다. 그 결과로 9가지 정책 제언을 담은 책 ‘한일관계, 이렇게 풀어라’를 펴냈다. 일본 정부의 전향적 태도와 한국 정부의 대화 의지를 강조한 것이 제언의 핵심이다. 원론적으로 맞는 이야기이지만, 현재로선 이뤄지기 어려운 주문이다. 무엇보다 아베 정권의 결자해지(結者解之)를 기대할 수 없는 탓이다. 아베 총리는 올해 발표할 ‘종전 70년 담화’에서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침략과 반성을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했다. 이런 태도라면 과거사 문제를 매듭짓고 미래 관계를 지향하자는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소망에 부응하는 수준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한·일 갈등의 얼음덩어리는 민간과 지방자치단체 쪽에서 서서히 깨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일 지식인들의 제언도 민간과 지자체 교류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29일 도쿄(東京)에서 열리는 한·일 지사 회의를 주목한다. 이 회의에서 경제·문화 분야 협력 강화를 골자로 한 성명서가 발표될 예정이다. 실효성 있는 내용이 될 것이라고 보진 않지만, 7년 만에 열리는 한·일 지사 모임에서 공동성명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

한·일 수교 5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계 행사들도 활발하게 진행돼야 한다. 그것들을 통해 일본 내 혐한 논리를 누그러뜨려야 한다. 과거사를 직시하고 그것에 대해 사죄하고자 하는 양심적 일본 지식인들의 입지가 확대돼야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 사회에 ‘반(反) 아베’ 정서가 강한 시기인데도 대중 매체를 통해 일본인에 대한 친근감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영방송인 KBS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단적인 예다. 지난 일요일 이 프로는 일본 톱 모델 야노 시호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내보냈다. 야노 시호의 할머니, 어머니, 남동생 등이 등장해 일본말 속에 한국말을 섞어 대화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 한국계 격투기 선수 아키야마 요시히로(한국명 추성훈)의 아내인 야노 시호는 이 프로를 통해 한국 시청자에게 친숙한 인물이 됐다. 이 프로의 내레이터는 그를 칭할 때 친구처럼 성을 빼고 이름 ‘시호’만 부른다. ‘친(親) 시호’ 정서를 자연스럽게 퍼트리고 있는 것이다.

‘친 시호’와 ‘반 아베’의 정서 중 어떤 것이 더 우세하게 될까.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두 가지 정서가 팽팽하게 맞서며 공존하리라는 게 개인적 견해다. 한·일 양국의 민간 문화 교류는 갈수록 활발해질 것이나 일본 정부가 패권주의를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5년 전 일본으로 건너가 현재 일본의 한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한국인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과는 친하게 지내되, 일본은 경계해야 합니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