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방민호 서울대 교수가 본 서울 신림동 녹두거리
이 산책을 나는 오래 계속해 왔다. 대학 시절의 기억이 나를 늘 이곳으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녹두거리. 이 거리는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에도 이미 존재했고, 여러 번 단장을 거쳤지만 지금도 옛날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전통적인 골목의 길이, 아니 차라리 깊이라고 해야 할 그것은 불과 150m나 될까 말까 하다. 또, 그 옛날부터 차 두 대가 가까스로 비껴갈 정도로 좁다.
그러나 내게 이 골목거리는 청춘의 모든 사연들, 그 슬픔과 기쁨, 절망과 방황과 사랑이 깃들어 있는 곳, 나와 같은 젊음을 거쳐 간 수많은 이들의 애환이 스며 있는 곳이다.
오늘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옛날 이곳에 버스라고는 289번, 114번, 152번 정도밖에 없었다. 그때 서울대 학생들은 즐겨 걸었다. 많이들 가난했고, 걷는 것, 걸으면서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서울대 정문을 빠져나오면 그들에게 두 가지 선택권이 주어졌다. 서울대입구역 쪽으로 언덕길을 넘어갈 것이냐, 신림 사거리 쪽으로 버스 두 정거장 거리를 걸어갈 것이냐.
전자 쪽을 택하면 서울대입구역 거의 다 가서 오른쪽에 ‘레벤호프’라는 술집이 하나 있을 뿐 그밖에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학생들은 즐겨 후자 쪽으로 기울었다.
그 옛날처럼 신림 사거리 쪽을 향하여 도림천의 왼쪽 날갯길을 따라 걸어가 본다. 맨 처음에 관악산 공원 입구, 주차장이 나오고, 이 옆을 스치듯 계속해서 걸어가면, 아침에 학생들이 버스를 기다려 길게 줄지어 서는 서울대 셔틀버스 정류장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 ‘달콤이’라는 커피점이 있다. 초승달 모양과 알파벳 ‘com’을 조합해서 간판을 삼은 이곳은 특히 우리 과 대학원생들이 좋아한다.
이제 조금만 더 걸으면 녹두거리 입구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옛날에 이 부근에 커피를 파는 곳은 두 곳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 ‘까페지오’가 있던 자리를 지나치면, 한남여객 차고지 입구가 나오고, 그 바로 옆에 ‘그날이 오면’이라는 인문학, 사회과학 전문서점이 있다. 이 서점은 시대와 호흡을 같이하려는 젊은이들의 서식처다.
이 서점 사장은 곧이곧대로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학생들의 지성에 관계되는 책들만을 팔아왔고,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관심사를 파악할 겸 이 서점에 자주 들른다.
여기서 몇 걸음 더 걸어가면 드디어 오늘 이야기의 중심, 녹두거리다. 골목 어귀에 ‘삐에스몽테’ 과자점과 롯데리아가 있다. 여기서부터는 정말 현재로부터 과거가 간단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화랑교 다리다. 이 오래된 다리 아래로 여름 장마 때면 도림천 물이 꽤 콸콸거리며 거세게 흘렀다. 밤에는 포장마차가 서서 맥주컵에 소주를 가득 따라 마실 허름한 옷차림의 술손님을 기다렸을 것이다. 지금은 깨끗하게 단장을 했다.
나는 대학원 다닐 때쯤 삐에스몽테 과자점 2층에서 이 다리 쪽을 향해 고적한 심정으로 앉아 있곤 했다. 유리창 아래로 레코드 행상이 김현식의 ‘사랑했어요’를 잔뜩 틀어놓고 있는 것을 보며.
거리를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면 먼저 왼쪽으로 옛날에 ‘광장서적’이 있었고, 또 무엇보다 ‘녹두집’이라는 선술집이 지하에 있었다. 소주, 막걸리에 안주로는 나박김치, 배추김치, 그리고 라면이 고작이던 이 집에 학생들은 가방을 맡겨놓고 시위를 나가곤 했다. 이 집이 있어서 이 거리 이름이 녹두거리가 된 것이다.
그 자리는 대대로 술집 차지였다. ‘청벽집’도 되고 비교적 최근에는 ‘녹두호프’로도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녹두집 자리 맞은편으로 골목이 하나 나 있는데, 그 모퉁이는 지금 ‘프랭코스’ 커피 전문점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왼쪽으로 꺾어져 들어가는 골목은 예나 지금이나 어둡고 신비스러운 느낌이 든다.
녹두집 자리 위쪽으로는 베트남 칼국수집인 ‘하노이별’, 또 일식을 파는 ‘코네루’가 있는데, 이 집들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것들, 다시 그 위로 ‘황해도 빈대떡’이라는 오래된 집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목하 이 거리는 문화 혼합 지대의 면모가 여실하다.
그러나 그것은 커피 전문점이 불과 두 개, 호프집 하나 말고는 이렇다 할 것이 없는 옛날에도 그랬다. 하노이별 맞은편쯤에는 ‘까페 베리’라는 커피 전문점이 있었는데, 이곳이야말로 지금은 사라진 아름다운 곳. 우리들은 거기서 아마도 50 전후의 여주인에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신청해 듣곤 했다. 그 시대에 신림동 일대에서 고전적인 서양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은 캠퍼스 안의 음악감상실과 이곳 까페 베리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곳에 자주 가서 살다시피 했고, 영화배우가 된 정진영 선배가 연극 동아리를 포기하지 말라고 내게 드라이진을 사준 곳도 여기. 우리는 독한 술 한 병을 팝콘 하나로 다 비우고 내 하숙집에 올라가 뻗고 말았다.
그때, 나는 외톨이가 된 고독감에서 벗어나려고 친구들이 있었으면 하고 이 지하 카페 문을 수시로 열어보곤 했지만 그때마다 내가 아는 얼굴들은 거기 없었다. 대학 시절 내내 나는 이 녹두거리를 중심으로 그 옆, 위, 건너편, 안쪽 등을 맴돌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끝내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고독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거리를 아래로부터 위로, 위로부터 아래로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나중에는 높아져 가는 학년을 따라 아는 얼굴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친구는 노문과 누구, 이 사람은 분명 사대 국어과인데, 아크로폴리스(캠퍼스 내 학생 집회 공간)에서나 만났지 이름도 모른다, 이 선배는 철학과지 아마?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많던 그 시대, 우리들은 모두 녹두거리의 아이들이었다. 외로움도, 슬픔도, 분노도, 사랑도, 이곳에서 저작되고 소화되었다. 그러니 이곳은 어쩌면 지방 학생들의 보금자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지난 20년 동안은 고시생들의 공간 노릇을 하기도 했다. 고시학원이 생겨나고 이를 따라 고시생 전문 원룸 빌딩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꿈, 야망을 이루려 모여든 젊은이들이 이 녹두거리가 끝나는 왕약국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골목골목마다 들어찼다. 이들이 밤이면 서울대생들, 바깥에서 찾아온 젊은이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달랬다.
이제 그 왕약국 사거리다. 사거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작은 사거리. 여기서 위로 더 쭉 올라가면 거리는 시장 풍경을 잠깐 연출하다 화려하지 않은 주택가가 된다.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그 어느 곳에 우체국이 숨어 있는 주택가가 있고, 왼쪽으로는 고시촌 건물들이 골목마다 들어차 있다. 그 때문에, 이 왼쪽으로 커피숍이며 카페며, 각종 생활 편의시설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세상의 변천은 빠르다. 고시도 이제 한물가면서 언제까지나 번창할 것 같던 이 세계도 저물어가고 있다. 젊은 고시생들이 떠나가고 있다. 하지만 녹두거리, 이 젊은이들의 양지는 앞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거리는 세월을 따라 새 단장을 했지만, 나는 이 모퉁이마다 숨어 있는 옛이야기들, 그리고 오늘의 청년들의 숨결을 느낀다. 시대는 가도 거리는 남는다. 남아 있어야 한다.
국문학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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