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가운데) 미국 부통령이 26일 워싱턴DC 국무부 청사에서 열린 제1회 카리브해 에너지 안보 이니셔티브(CESI)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던 중 활짝 웃고 있다.  AP연합뉴스
조 바이든(가운데) 미국 부통령이 26일 워싱턴DC 국무부 청사에서 열린 제1회 카리브해 에너지 안보 이니셔티브(CESI)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던 중 활짝 웃고 있다. AP연합뉴스
유가 하락으로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26일 수도 카라카스 대통령궁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유가 하락으로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26일 수도 카라카스 대통령궁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美, 카리브해 국가 원조 속내는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은 지난 26일 카리브해 연안의 20개국 정상과 대표들 앞에 섰다. 그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 친구와 그날 아침에 나눈 대화를 소개했다. 친구는 “200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V S 나이폴이고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생”이라고 말했다. 아일랜드계인 바이든 부통령은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도 199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히니의 작품 ‘트로이의 해결책(The Cure at Troy)’에 나오는 한 구절을 정상들 앞에서 읊었다. “역사는 무덤가에서 희망을 갖지 말라고 가르치네. 그러나 일생에 단 한 번, 간절히 기다리던 정의의 파도가 솟구칠 수 있다면, 역사와 희망은 함께 노래하리.” 그리고 바이든 부통령은 “이 시구에 우리가 오늘 찾는 답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미국과 쿠바의 국교정상화 선언 이후 중남미 카리브해에 화해의 물결이 일고 있다. 미국은 바하마와 자메이카는 물론 남미 좌파 블록인 볼리바르 동맹 소속인 도미니카연방 등에도 원조와 지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카리브해 다가서기’는 오랫동안 중남미 맹주 역할을 하던 베네수엘라의 그림자를 지우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최근 부쩍 중남미에 공을 들이는 중국에 대한 견제전략이기도 하다. 미국 입장에서는 뒷마당인 카리브해가 중국의 손에 놓일 경우 ‘제2의 쿠바 미사일 위기’가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장담치 못한다. 더 파헤쳐 들어가 보면 저유가 시대를 맞은 미국의 세계질서 재편 의지도 엿보인다. 저유가는 국제정치 역학관계 변동을 불러오고 있고, 카리브해에서도 미국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카리브해 국가 정상들과 바이든 부통령의 만남은 워싱턴 DC의 ‘제1회 카리브해 에너지 안보 이니셔티브(CESI)’에서 이뤄졌다. 아루바, 바하마, 벨리즈, 콜롬비아, 쿠라카오, 도미니카공화국, 그레나다, 가이아나, 아이티, 자메이카, 세인트키츠네비스, 세인트루시아, 수리남, 트리니다드 토바고 정상과 대표가 참석했다. 참가국에는 앤티가 바부다, 도미니카연방,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도 있었다. 이들 3개국은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 2001년에 설립했던 볼리바르 동맹 소속이다. 서방 진영에서는 미국과 함께 프랑스, 독일, 영국, 캐나다, 영국 대표가 모였다. 세계은행(WB)과 카리브해개발은행(CDB),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도 대표를 보냈다.

CESI의 핵심 논제는 에너지 독립과 원조 지원, 부패 척결의 세 문구로 요약됐다. 카리브해 국가들에는 그동안 뒤를 봐준 베네수엘라 영향권에서의 이탈을 의미했다. 바이든 부통령은 ‘정의의 파도’로 불렀지만, ‘중남미 맏형’에게 사실상 등을 돌리는 셈이다. 대부분 작은 섬나라인 카리브해 국가들의 미래는 밝지 않다. 변화의 바람은 전세계 원유 매장량 1위인 베네수엘라의 국가수입이 저유가로 반토막 나면서 시작됐다. 최근 국제원유 가격이 40달러 후반으로 주저앉자 베네수엘라는 모라토리엄(채무 불이행) 위기까지 몰리고 있다. 카리브해 국가들에 대한 원유 원조와 지원도 중단할 처지다. 베네수엘라는 지난 2005년 카리브해 연안국을 중심으로 중남미 17개국과 석유동맹(페트로카리베)을 맺고 ‘반값 석유’를 공급해왔다. 카리브해 국가들 역시 에너지 필요량의 90%를 베네수엘라에 의존해 왔다. 원유는 볼리바르 동맹과 카리브해 국가들을 정치적으로 묶어 세우는 동력이었다.

이날 바이든 부통령은 “어떤 나라도 우크라이나나 카리브해 연안 국가 등 다른 나라에 대해서 천연자원을 강제의 도구로 사용할 수 없다”고 외쳤다. 러시아와 베네수엘라를 겨냥한 비판적 언급이었다. 그는 “변화의 시대를 맞은 상황에서 미국은 도움의 역량과 의지가 있다”며 “우리 앞에는 할 일이 많이 놓여 있고 카리브해 국가들은 기회를 맞고 있다”고 역설했다. 바이든 부통령은 “에너지 독립이 필요하다”고 직선적으로 요구했다. 다른 서방국가들의 회의 참석은 카리브해 국가들에 투자 약속과 다를 바 없었다. 세계은행의 참석 역시 차관 지원을 의미했다. 현재 페트로카리베 소속 국가들이 베네수엘라에 지고 있는 채무는 200억 달러를 넘는다. 변변한 산업 없이 관광으로 살아가는 작은 섬나라에는 엄청난 액수다. 바하마의 페리 크리스티 총리는 미국의 제안에 대해서 “카리브해 지역의 경제는 제한된 재정 여건과 막대한 국가부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적극적 관심을 표명했다.

중국 역시 카리브해와 중남미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은 지난 8일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서 ‘제1회 중국-라틴아메리카 포럼’을 주재했다. 라틴아메리카-카리브 국가공동체(CELAC) 33개 회원국 중 30개 국가 40여 명의 장관급 관료가 참석했다. 중국은 경제 위기에 처한 중남미와 카리브해 국가들을 베이징으로 불러 모았고, 투자를 약속했다.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견제하면서 제3세계 국가와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자리였다. 사실 미국도 중남미와 카리브해의 주도권을 중국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이번 CESI 회의를 서둘러 개최했다. 주요 2개국(G2)인 미-중의 대결은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 중남미와 카리브해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지금 미국은 카리브해 연안 국가들에 부패척결과 투명한 경제운용을 요구하고 있다. 투자가 이뤄지고, 원조가 제공되려면 자금이 제대로 쓰이는 토대가 필요하다. 이는 미국식 국제금융 시스템으로의 편입이다. 정치적 불확실성과 부패한 경제구조로는 투자와 원조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은 단순한 자금 지원을 넘어 재생 에너지 개발을 원한다. 카리브해 국가들이 조력과 풍력, 태양열 등 천연 에너지에 집중 투자해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 국제유가 변동과 무관한 지속가능한 경제구조를 갖추게 만든다는 구상이다. 중남미 전문가인 브루킹스 연구소의 해롤드 트린쿤나스 수석 연구원은 “이번 CESI 회의는 지속가능한 에너지 투자의 골격을 짜는 동시에 정치적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한 최적의 시점에 열렸다”고 말했다. 미국의 시선은 카리브해 국가들의 베네수엘라로부터의 완전한 에너지 독립, 중남미 국가들과의 화해를 통한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 편입으로 모아지고 있다. 저유가의 ‘보이지 않는 손’은 미국에 국제정치의 지형을 새롭게 그려나가는 출발점을 제공하고 있다.

워싱턴=이제교 특파원 jk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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