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해킹을 통한 개인정보 유출을 시작으로 첨단산업·국가기밀을 해외로 넘기려는 스파이 활동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사진은 한국인터넷진흥원 종합상황실 관계자들이 전 세계로부터의 사이버 위협 상황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
국가핵심기술·세계일류상품 등 우선 보호할 기업 1017곳인데 年100억 예산 300곳 지원 그쳐 美 벌금 최고 50만→500만달러
경제스파이법 처벌 강화하는데 韓은 실형 6.9% ‘관대한 판결’
“산업스파이는 21세기 가장 큰 사업 중의 하나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전망이자 경고다. 정보.사법당국의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사라지지 않는다면 남는 방법은 철저한 사전 대비다. 6일 정보당국 관계자의 말처럼 “산업기밀.국가기밀 유출자를 색출해 엄벌할 수는 있지만, 이미 유출돼 해외로 넘어간 기술은 회수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현실은 충분한 사전 대비와 거리가 멀다. 정부가 첨단기술 개발을 위해 매년 약 17조 원의 연구·개발(R&D) 예산을 투자하고 있지만 이를 보호하는 데 배정된 예산은 0.05%에 불과하다. 기술 보호를 위한 정부 예산은 연간 100억 원 수준. 이 정도 예산으로 산업보안 사업을 지원할 수 있는 기업은 300여 개에 그친다. 현재 300만 개가 넘는 국내 기업 가운데 우선적으로 기술 보호가 필요한 기업 1017개를 감당하는 데도 턱없이 부족하다. 현재 국가 핵심 기술을 보유한 기업은 98개, 세계 일류상품 기업은 727개다.
사법당국의 느슨한 처벌도 기밀유출 사건의 재발을 막는 데 부족하다는 평가다. 경찰청 통계상 2009∼2013년 5년간 산업기술 유출 사범 처벌 현황을 보면 기소된 719명 중 형 확정자 464명을 기준으로 볼 때 실형은 단 32명(6.9%)에 불과했다. 대부분이 집행유예(287명·61.9%), 벌금(72명·15.5%) 등 가벼운 처벌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기밀 유출 방지와 스파이 색출을 위해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가정보원의 한 요원은 이날 문화일보 취재팀과 만나 “핵심 기술 유출의 피해가 국가경쟁력 저하로 이어지는 중대한 사안임에도 한국 법조계에서는 이를 화이트칼라 범죄가 아닌 생계형 범죄로 보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선진국들이 산업스파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처벌을 강화하고 있는 추세인 데 반해 한국에는 여전히 ‘온정주의’가 통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술 유출로 인한 피해액이 연평균 50조 원에 이를 정도로 심각하지만 이처럼 보안의식은 여전히 허술하고, 법적·제도적 보완책 마련도 시급한 상황이다. 미국을 비롯해 일본·중국 등은 자국 기업의 영업비밀 보호를 위한 법제를 강화하고 있는 추세다.
미국은 최근 산업기밀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범정부 전략을 추진하면서 ‘경제스파이법’을 개정해 처벌을 강화했다. 벌금액을 최고 50만 달러에서 500만 달러로 올렸고 영업비밀 가치의 3배 이내 벌금형도 도입했다. 외국인투자위원회(CFIUS)는 국가안보와 연계된 것으로 판단되는 투자·거래를 하면서 신고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서는 자체 조사를 하고 있다. 일본도 올해 영업비밀보호법을 새로 제정하고 영업비밀센터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이 같은 국제사회의 추세에 맞춰 양형 기준 강화 등 제도 개선에 나섰지만 뒤늦었다는 평가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산업기술 유출방지 및 보호지원에 관한 법률’을 고쳐 오는 4월부터 양형 기준 등을 강화한 개정법을 시행한다. 산업기술유출방지법은 2011년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법 개정안을 발의해 국가로부터 지원받아 핵심 기술을 개발한 기업 인수.합병(M&A) 시에는 정부에 신고하도록 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현실을 반영해 등록 대상을 보다 넓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 재무부가 2000년 이후 매년 북한과 관련한 금융주의보를 내리고 있음에도 정작 우리 정보당국에 테러 자금을 추적할 권한이 없는 것도 적지 않은 문제로 지적된다.
한국은 2001년 국제자금세탁방지 관련 규범을 이행하고 외환 자유화 전면 시행에 따른 불법자금 유출입 방지를 위해 금융위원회 산하에 ‘금융정보분석원’(FIU)을 설립했다. FIU에서는 자금세탁·테러 자금 차단, 탈세 관련 의심금융거래 및 고액현금거래 정보를 금융사로부터 제공받아 분석해 그 결과를 검찰·경찰·국민안전처·국세청·관세청·중앙선거관리위원회·금융위 등 7개 기관에 제공하고 있지만 여기에 국정원은 빠져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 정보기관의 빅데이터 접근에 따른 지나친 정보 집중현상이나 불순한 목적으로의 임의 사용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당국 관계자는 “산업스파이 색출을 위해서는 첩보단계에서 확실한 단서를 잡아서 조사를 해야 하는데 통신 감청 대상에서 한국인은 제외하고 외국인만 가능하도록 돼 있어 제약이 적지 않다”고 털어놨다. 기밀 유출의 80%가 기업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군사기밀을 유출한 혐의를 받는 외국 스파이 I 씨의 경우 외국 정보기관에서 자국 금융 거래 내역을 국정원에 제공하면서 한국 내 금융 계좌 확보를 의뢰해 왔지만, FIU 정보접근 불가로 정보를 주지 못해 양국 간 합동작전에 차질을 빚은 사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