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김정묘 시인이 본 경기 남양주 홍유릉 일대
능에 들어가기 전 ‘홍유릉(洪裕陵)역사문화관’으로 향한다. 고종 황제의 국장을 치르는 사진영상 앞에 발을 멈춘다. 고종의 붕어를 알리는 신문기사 사진부터 덕수궁 대한문을 나오는 대여 사진, 장례를 마치고 추운 듯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돌아갈 채비를 하는 내인들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인 양 눈을 떼지 못한다. 살곶이다리를 지나는 순종의 장례행렬, 사람 키의 몇 배나 됨직한 죽안마(竹鞍馬)를 태운 마차 행렬 사진을 보고 또 본다. 사진 속의 궁녀나 죽안마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어느 때는 공책을 들고, 어느 때는 배낭을 메고, 때론 장바구니를 든 채 수시로 이곳을 드나든다. 내 그림자가 죽안마로 변하는 것은 아닌가, 뒤돌아 볼 때도 있다.
◇홍유릉, 신의 정원을 거닐다=남양주에 들어온 지도 20년이 흘렀다. 남양주시 전신인 미금시였을 당시 서울 을지로에서 망우리를 지나 홍유릉이 있는 금곡 종점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들락거린 세월까지 합하면 30년이 훌쩍 넘는다. 그때만 해도 어느 곳에서든 산이 보이고, 좁은 논길을 걸을 때면 개구리 소리가 와글와글하고 반딧불이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세월 따라 논이 밭이 되고, 밭 자리는 비닐하우스와 조립식 창고가 들어서고, 새로 생긴 큰길을 따라 아파트단지와 상가, 공원, 도서관, 마트, 은행들이 들어서며 수도권 도시로 변화해왔다. 변화 속도는 해가 갈수록 빨라져 하천은 복개천이 되고, 낮은 지붕의 옛집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던 골목들은 무대, 어룡, 양골, 돌팍고개, 장내, 약대울 같은 마을 이름만 남았다.
그에 비해 금곡동(홍유릉로)은 홍유릉 덕분에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되어 마을 한가운데 큰 녹지공간을 품고 있게 된 셈이다. 자연으로 돌아간 죽음이 생명이 움트는 숲으로 돌아와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길을 내주고, 속도와 변화를 좇는 강박증이 이곳에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입춘 안개비도 다녀가셨으니 응달의 잔설도 녹아 이대로 날이 풀려 곧 봄이 올 것 같다. 하지만 침전이 있는 홍살문에 들어서자 갑자기 바람 끝이 차다. 찬바람 속에도 능의 잔디는 황금빛으로 빛난다. 능은 사계 중에 잔디빛깔이 금빛으로 휘감기는 ‘겨울 능’이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홍유릉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이다.
고종과 명성태황후의 능인 홍릉과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능인 유릉이 있는 대한제국의 황릉이지만, 황제 스스로 능호조차 갖지 못해 먼저 간 황후들의 능호를 따라 쓴 곳이다.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 러일전쟁, 대한제국 선포, 조선왕조 몰락과 같은 긴박했던 구한말 어마어마한 역사적인 기록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다면 황릉은 호젓하게 산책하기에 기막히게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문 하나 들어서는 걸로 죽음의 터부를 깨뜨리고 아름드리 조선소나무가 숲을 이루는 신의 정원을 거닐 수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능의 침묵은 사노라 아등바등 애면글면 애태우는 산 자의 근심 덩어리를 단숨에 삼켜버린다. 그래도 신라왕릉처럼 한 1000년 지나면 모를까 이곳 능의 주인들을 떠올리면 아직 가슴이 시리다. 이제 겨우 100여 년이 흐른 것이다.
한동안 부드러운 능선을 꿈길처럼 바라보고 있는데 침전 지붕에서 얼음눈이 우르릉거리며 처마 밑으로 떨어진다. 언제 들어왔는지 한 무리의 관람객이 해설사에게 침전 앞에 도열해 있는 석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그제야 신전은 뜻밖인 듯 속세로 돌아온다.
“여기는 황제능이라 석물이 능 아래 신도(神道)로 내려옵니다.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와 같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왜일까요? 중국 명나라 황제릉을 벤치마킹했기 때문이죠. 침전 제사상 색깔도 모두 황금색입니다. 왜요? 황제니까. 침전 옆에 향나무 보이시죠? 왕릉에서는 다섯 가지 나무를 쓰는데, 기개와 왕조 번성을 상징하는 소나무가 가장 많고, 향나무는 주로 재실 옆에 심는데 나뭇가지를 향으로 쓰기 위해서고, 뽕나무와 밤나무는 신위와 위패를 만들고, 참나무는 불이 잘 번지지 않는 성질이 있어서 능 가장자리에 들어옵니다. 이제 능이 좀 들어오시죠? 자, 이제 유릉으로 가 보시죠. 순종 황제께서 아버지 고종 문상을 자주 못 올 때는 수화기에 대고 곡을 하면 관리가 송화기를 확성기에 연결해서 홍릉 앞에 곡소리가 울려 퍼지게 했다고 합니다.”
관람객들은 해설자를 따라 유릉 쪽으로 올라가고, 나는 차마 신위가 다니는 신도로 걷지 못하고 가장자리 어도(御道)에 놓인 바닥 돌을 세며 걸어 나온다. 어도에 깔린 돌은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놓였다고 한다. 머리를 숙일 수 있도록. 나는 고개를 떨군 채 얼마 전 보수공사를 마친 재실 앞을 지나 능 밖 산책로로 향한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길=날이 풀리긴 풀렸나 보다. 얼었다 녹아 질퍽해진 흙이 신발에 달라붙어 걸음이 느려진다. 능 입구 구멍가게는 오늘도 문이 닫혀 있다.
봄, 여름에는 소풍 온 아이들이 얼음과자라도 찾고, 동네 사람들이 평상에 앉아 사람구경이라도 하지만 겨울에는 그나마도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홍유릉 산책로는 능 밖이지만 능 안에 난 사잇길이나 마찬가지다. 산책로를 중심으로 보면 왼쪽에 홍릉과 유릉, 능 안에는 있지만 황릉과 구별해서 담을 치고 영친왕과 방자 여사를 모신 영원(英園·왕=능, 태자=원)이 있고, 덕혜옹주와 의친왕 묘가 있다.
산책로 오른쪽은 광화당, 수인당, 삼축당, 덕수 장씨 등 후궁들의 묘가 있는 곳으로 개방을 하지 않아 왕릉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산책로는 걷고, 뛰고, 어슬렁거리며 삼삼오오 약수터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대기도 하지만 겨울에는 소나무에 핀 눈꽃,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은행단풍으로 황홀하고, 자신의 발걸음 소리만 오롯이 들리기도 하는 한적한 길이기도 하다. 언제 보아도 눈을 편안하게 해주는 논밭을 지나며 능참봉이 살았던 집은 어디쯤이었을까, 헤아려보게 된다. 홍릉천 빨래터는 어디쯤이었을까, 방자 여사와 낙선재에 남은 내인들은 황실도서관인 낙선재 서고의 ‘대장편소설’을 읽으며 시름을 달랬을까. 왕가의 몰락을 지켜본 슬픈 이름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길이다.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처럼 내 발걸음 소리와 내 숨소리를 듣기 위해 걷는 일밖에 달리 할 일이 없던 시절, 나는 능길을 돌며 아픈 몸을 추스르고, 산등성에 꽃불을 놓고 넘어가는 저녁해를 하염없이 바라볼 줄도 알게 되고, 동지섣달 차고 시린 초승달을 올려다보느라 새벽 서리를 맞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걷는 동안 하늘과 나무와 꽃, 풀들이 조금씩 보였다.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조금씩 들렸다. 내 안에 갇혀 있던 소리가 조금씩 들렸다. 그것이 ‘사는 게 무엇인가’ 묻는 나에게 격동과 비운과 몰락 속에 핀 아름다운 옛길, 능길이 들려주는 대답 같았다. 나는 다산둘레길로 이어지는 홍유릉 후문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겨울 숲은 입춘 운운하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겠지만 금곡 옛 종점에 가면 할머니들이 펼쳐놓은 노점에서 일찍 깬 봄의 정령을 만날 수 있을지 혹시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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