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학용 /논설위원

며칠 전 성공한 재미교포 벤처기업인을 만났다. 실리콘밸리의 중심 새너제이에서 정보기술(IT) 사업을 하는 그는 필자에게 한국 진출 포기담을 털어놨다. “한국에서 사업해볼 요량으로 1년 전 타당성 조사를 했다. 금융 풍토와 시스템이 기술 하나로 먹고 크는 벤처 사업에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전직 장관은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정책 입안 전 벤처 사업가를 만났더니 돈을 더 빌릴 필요가 없는데도 은행이 자꾸 더 가져다 쓰라고 해 힘들었다고 하더라. 돈 빌리기가 어렵다고 읍소할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 기술금융의 두 얼굴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들이다.

은행권은 요즘 기술금융으로 온통 난리다. 은행장들은 기술금융을 입에 달고 다닌다. 금융 당국 수장들도 기술금융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죽기 살기(죽어도 기술금융 살아도 기술금융)’ 건배사까지 만들었던 신제윤 금융감독위원장은 집무실에 상황판도 설치해놨다. 실적을 임직원 성과급에 반영하는 ‘고전적’ 관치도 동원됐다.

담보 없이 기술력만으로 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기술금융은 한국 경제의 막힌 혈맥을 뚫어줄 아스피린 같은 존재다. 그래서 박근혜정부의 기술금융 활성화 정책은 옳은 방향이다. 하지만 시장과의 소통 없는 몰아붙이기식 접근으론 대규모 부실의 후유증을 낳으며 패착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기술금융 주체를 은행으로 삼은 건 정공법이 아니다. 국내 은행은 예대마진과 수수료 수입으로 연명하는 상업은행이다. 리스크가 크고 대규모 지원을 요하는 기술금융과는 상극이다. 자본시장이 오죽 열악했으면 정부가 제 갈 길도 먼 은행에 선도역을 맡겼을까 하는 동정심도 든다. 담보·보증 대출만으로 땅 짚고 헤엄 치기 식 영업을 하는 은행에 ‘메기’를 풀고도 싶었을 게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권고대로 전통산업 지원엔 은행이, 벤처기업 지원엔 자본시장이 중심이 되는 게 정도(正道)다.

기술을 제대로 평가할 능력도 없는데 실적 타박만 하니 은행은 하는 척만 한다. 기술력 있는 기업의 신용대출을 기술대출로 돌리는가 하면 자영업자 대출도 기술신용평가서만 받아오면 기술대출에 끼워 넣는다. 은행들의 기술금융 실적이 반년도 안 돼 40배 가까이 폭증했다니 기술금융 잔혹사의 전조(前兆)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황영기 신드롬’도 기술금융 안착에 걸림돌이다. 황 신드롬은 그가 우리은행장 때 정부 지침에 힘받아 파생상품에 적극 투자했다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엄청난 손실을 내자 중징계당한 이후에 극심해진 금융 보신주의를 일컫는 조어(造語). 그러니 “기술금융을 하다 손실을 내도 면책해줄 테니 안심하라”는 당국의 감언을 은행들이 믿을 리 없다.

그렇다고 우리나라를 기술금융의 불모지로 내버려둬선 안 된다. 굳이 창조경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대외의존형 경제에서 기술은 미래이기 때문이다. ‘대변혁’의 3차 산업혁명이 태동하는 시점이라 더욱 그렇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금융 당국은 이제라도 관(官) 주도의 실적 지향적 정책을 접고 긴 호흡과 인내심을 갖고 시장 지향적 정책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실리콘밸리 성공의 견인차도 정부가 아닌 시장이다. 초기 창업투자(엔젤투자)에서 투자금 회수(엑시트)에 이르는 벤처 생태계가 작동되지 않는 현실에서 자금만 퍼붓는다고 생태계가 살아나질 않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벤처 생태계의 큰 그림 속에서 기술금융 정책을 촘촘히 재설계해야 한다. 그런 이후 당국은 단계별로 금융 시스템이 잘 작동하고 있는지 꼼꼼히 점검하고 고장 난 부분에 한해서만 관여해야 한다. 벤처캐피털 등 모험자본 규제 완화도, 기술금융평가사(TCB) 구조개혁도 그 같은 방향 속에서 병행돼야 한다. 조금만 어려워져도 리스크를 지지 않으려는 금융계 풍토도 달라져야 함은 물론이다.

재임 중 금융 치적 만들기에 급급했던 역대 정권은 정책 슬로건을 불쑥 내놨다가 다음 정권에서 폐기되는 수모를 당했다. 금융계에선 노무현정부의 금융허브는 ‘금융허구’, 이명박정부의 녹색금융은 ‘녹조금융’이라는 자조마저 나오고 있다. 지금 같은 목 비틀기 식 정책이 계속된다면 박정부의 기술금융도 ‘사술(詐術)금융’으로 추락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