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산성은 남한강변 해발 427m의 성산 위에 쌓은 석축산성이다. 삼국시대에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전투가 치열하였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길이 682m, 높이 3m의 반월형으로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동·남·북 3문(門)과 수구(水口)가 남아 있다. 옛 기록에 성 안에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일부러 메웠거나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온달장군이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을 탈환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전사한 것은 590년(영양왕 1년)이었다. 가장 관심을 모으는 것은, 그가 어느 곳에서 전사했느냐 하는 것이다.

서울 광진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 있는 아차산성으로 보는 견해와 단양 영춘의 온달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맞서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온달산성이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은 것은 역사서의 기록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온달장군의 전사와 관련, 삼국사기에는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而死(아단성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서 죽고 말았다)’라고만 쓰여 있다. 결국 ‘아단성’이 어느 곳이냐가 결정적 열쇠인데, 이에 대한 해석이 크게 엇갈린다. 아차산성이라는 쪽은 성 이름이 아단성(阿旦城)에서 아차성(阿且城)으로 다시 아차성(峨嵯城)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또 온달이 남긴 말 가운데 “신라가 우리의 한수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삼으니, 그곳의 백성들이 애통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시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라는 대목을 근거로 마지막 싸움터를 서울의 한강 북쪽 아차산성으로 본다.

하지만 온달산성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고구려 때 영춘의 지명이 을아단이었므로 아단성이 곧 지금의 영춘이라고 해석한다. 을아단의 ‘을’은 위(上)를 뜻하는 말이므로 ‘한강 상류의 아단’이라는 뜻이고, 거기서 을이 빠졌다는 것이다. 더구나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겠다고 출정한 온달이 지금의 서울에서 싸우다 죽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영춘에 온달장군·평강공주와 관련이 있거나 전쟁에서 유래된 지명 등이 수없이 많은 것 역시 온달장군과의 관련성을 뒷받침한다. 온달이 수련했다는 ‘온달동굴’ 외에도 기마병을 막기 위해 진을 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꼭두방터’가 있다.

‘은포동’은 돌포가 있던 곳이며, ‘쉬는 돌’은 온달이 후퇴하다가 윷을 놀던 곳이라고 한다. 하류의 ‘군간(軍看)나루’는 온달의 군사들이 파수를 보던 곳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군간나루 북쪽에 있는 ‘선돌’은 성 쌓기를 돕던 마고할미가 온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팽개친 것이라고도 하고, 온달을 도우려 달려오던 누이동생이 패전소식에 그 자리에서 굳어 돌이 된 것이라고도 한다. ‘피바위골’은 싸우면서 흘린 피가 바위에 많이 묻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집단 화장실이었던 ‘통쉬골’, 싸우다 죽은 사람을 일일이 흙에 묻을 수 없어 돌로 무덤을 만들었다는 ‘돌무지골’도 있다.

온달동굴은 약 4억5000만 년 전부터 생성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석회암 지대에 형성된 천연동굴로 굴과 지굴의 길이를 합쳐 800m 정도이며 내부에는 다채로운 종유석과 석순이 있다. 1979년 천연기념물 제26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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