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 전문가’로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세를 탄 이제춘(62) 더 젤㈜ 대표는 올해로 골프 구력 30년을 자랑한다.
그는 와인 병만 봐도 ‘맛’까지 줄줄 꿸 정도다. 하지만 골프는 아직 쉽게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와인보다 먼저 입문한 골프였지만 그에겐 늘 부족함만 안겨주기 일쑤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요즘도 매일 아침 6시면 어김없이 골프연습장을 찾는다.
그는 30대 초반이던 1986년부터 골프를 시작했고, 와인은 1991년부터 접했다. 골프는 처음 몇 년 동안 하는 시늉뿐이었다. 시작은 했지만 바빠서 못 치고, 더워서 못 치고, 추워서 안 치고 그런 식이었다. 당시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기업의 엔지니어링 컨설팅을 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와인은 달랐다. 노력한 만큼 실력과 명성이 올라갔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2010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이다.
당시 서울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타임은 ‘아시아의 마지막 미라클’이란 6쪽짜리 한국 특집기사에서 이 대표가 운영하는 와인사업체인 ‘더 젤’을 머리기사로 소개했다. 타임은 와인을 선진국 진입의 척도라고 전제하면서, 1인당 연간 와인 소비량이 프랑스의 40병에 비해 1.5병에 불과한 한국에서 세계인을 감복시키는 와인 창고의 주인이 이 대표라고 언급했다.
그의 와인 창고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하얏트호텔에서 경리단 길로 내려가다 보면 오른편 3층짜리 건물에 레스토랑과 함께 있다. 이곳에는 세계 곳곳에서 들여온, 1∼2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1000종류가 넘는 다양한 와인이 있다.
그는 평소 친분이 두텁던 국내 한 호텔 외국인 총지배인의 권유가 계기가 돼 와인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16세 때부터 독일에서 10년 이상 공부해 오면서 유럽문화도 잘 알고 외국어도 능통했다. 한국에는 와인을 매개로 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사교 장소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그는 와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문을 연 지 1주일 만에 외교관이나 상사주재원 등 국내 거주 외국인들 사이에 입소문이 났다.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맛보기 힘든 진귀한 와인이 그를 통해 국내로 들어왔다.
그의 골프 실력은 구력에 비해 초라한 편이다. 베스트 스코어는 7년 전 기록한 82타가 전부다. 요즘도 늘 연습장을 다니지만 아직 70대 스코어는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와인은 돈만 있으면(많이 마셔보면) 맛을 알 수 있지만 골프는 그렇지 않다”며 골프가 와인보다 어렵다고 말했다.
자신보다 늦게 배운 친구나 후배들에게 늘 ‘열린 지갑’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골프에 대한 열정만큼은 남들 못지않다. 이유는 ‘유쾌한 골프’를 즐기기 때문이다. 그의 골프 파트너 중에는 유난히 외국인들이 많다. 이들 중에는 주로 와인을 통해 알게 된 단골 고객들이 많은데, 이들과 함께한 골프에서 스코어나 승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져왔던 것.
그가 생각하는 골프의 또 하나의 매력은 의외성. 그가 작성한 유일한 홀인원도 실력보다는 의외성이 가져다준 행운이었다. 2005년 10월 중국 광둥(廣東)성 장먼(江門)시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인근 우이포부 골프장 동코스 5번 홀(파3·150m)에서 5번 아이언으로 친 샷이 빗맞아 땅볼로 굴러가는 모습에 실망스러워 몸을 돌렸다. 그런데 일행들이 홀로 향하는 볼을 보며 “엇! 엇!” 하더니 이내 환호를 터트렸다. 굴러가던 볼이 홀로 들어가면서 그의 골프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을 안겨다 준 셈이다.
이 홀인원 뒤 그는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매일 연습장에 다니다시피 했다. 연습장에서는 해결되던 스윙이 필드에만 나가면 늘 문제점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프로에게 레슨을 받은 뒤 필드에서 티샷을 무려 270m나 날린 적이 있다. 자신도 왜 그렇게 많이 나갔는지 몰랐지만, 이후에도 그의 장타력은 여전했다.
그래서 그는 골프를 양면성의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는 “시험 문제에서는 하나의 답이지만 골프에서는 답이 여러 개가 있다. 잘못된 스윙이라도 몸에 익히면 자신만의 스윙이 되기 때문에 나만의 정답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일을 성공하려면 반드시 ‘디테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와인 사업을 위해 매장을 그동안 1000여 차례 이상 바꿨다. 벽지도 새로 바르고 벽돌도 바꾸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고객이 원하는 세심한 부분까지 맞춰왔다. 그동안 연회비 500만 원을 받는 클럽 회원제로 운영해 오면서, 고객의 90%가 외국인이었다.
국내 와인 인구 증가에 발맞춰 지난해부터 회원제를 폐지하고 누구나 찾을 수 있도록 운영방식을 바꿨다. 하지만 그의 골프에는 디테일이 없었다. 골프를 할 줄만 알았지 어떻게 골프를 칠까 하는 디테일이 부족했던 게 지금까지 자신의 골프였다고 했다. 그는 “올해에는 70대 스코어 진입이 꿈”이라고 말했다.
최명식 기자 mschoi@munhwa.com
▶이제춘에게 골프란 = 와인과 같다. 골프를 잘 치려면 기본에 충실해야 하고, 골프를 제대로 즐기려면 정직해야 한다. 와인의 맛도 기후, 토양, 배수 등 ‘기본’에서 결정되며 속일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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