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이 유배 초기 머물렀던 주막의 바깥채 ‘사의재’.
다산이 유배 초기 머물렀던 주막의 바깥채 ‘사의재’.
동백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 백련사. 김낙중 기자
동백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 백련사. 김낙중 기자
유배지에서 만난 인연다산이 강진에서 만난 이들 중 가장 관심을 끄는 사람은 주막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의 주모였다. 모두가 외면할 때 방을 내주고 밥을 끓여낸 그녀는 다산이 심신을 추스르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다산은 유배 초기 정신적 충격으로 석 달이나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날마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에게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보라고 권한 사람도 주모였다. 그녀는 보통 여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산이 형 약전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어느 날 저녁 주인 노파가 제 곁에서 한담(閑談)을 나누다가 갑자기 물었습니다.

“영공(令公)께서는 글을 읽었으니 이 뜻을 아시는지요? 부모의 은혜는 다 같은데 어찌 아버지만 소중히 여기게 하고 어머니는 가볍게 여기는지요. 아버지 성씨를 따르게 하고, 상복도 어머니는 낮출 뿐 아니라 친족도 아버지 쪽은 일가를 이루게 하면서 어머니 쪽은 안중에 두지 않으니 너무 치우친 것이 아닌지요?”

그래서 제가 노파에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낳아준 시초라 하였소. 어머니 은혜가 깊기는 하나 하늘이 만물을 내는 것과 같은 큰 은혜를 더 소중하게 여긴 때문인 것 같소.”

그랬더니 노파가 또 말했습니다.

“영공의 대답은 흡족하지 않습니다. 내 그 뜻을 짚어보니 풀과 나무에 비교하면 아버지는 종자요, 어머니는 토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자를 땅에 뿌리면 지극히 보잘것없지만 토양이 길러내는 그 공은 매우 큽니다. (하략)”

저는 이에 뜻밖에도 저도 모르게 크게 깨달았고, 삼가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천지간의 지극히 정밀하고 지극히 미묘한 의미를 바로 밥 파는 노파가 말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매우 기이하고도 기이합니다.

다산의 말대로 기이한 일이다. 주모에게 ‘가르침’을 받은 다산도 그렇고 엄격한 남존여비 시대에 남녀 관계에 대해 일갈한 주모의 당당함도 놀랍다. 주막에서 4년을 지낸 다산은 강진읍 고성사에 있는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1년 가까이, 제자 이학래의 집에서도 2년 가까이 머문다. 1808년 봄에는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유배가 해제된 1818년까지 10여 년을 지낸다.

다산이 유배 시절에 가장 깊이 교류를 맺은 이는 혜장선사다. 둘 사이에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백련사를 찾아간 다산은 혜장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우연히 들른 객인 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섰다. 뒤늦게 다산을 알아본 혜장선사가 부리나케 쫓아가 손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차를 마시며 주역을 논했다. 결국 사자후를 토하듯 주역을 풀어가던 혜장이 다산의 질문 하나에 “20년 공부가 물거품입니다. 깨우침을 내려주십시오”라며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다산은 혜장과의 만남을 계기로 불교 서적을 읽고 배우게 됐고 차를 즐겨 마시면서 앓고 있던 속병도 차츰 낫게 되었다.

다산에게 혜장은 삭막한 유배생활에 빛과 같은 벗이었을 테고 혜장에게 다산은 배움의 갈증을 풀어준 스승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얼마나 정이 깊었으면 다산은 깊은 비 오는 밤에도 찾아오는 혜장을 생각해 문을 열어 두었다고 한다. 깊은 우정을 쌓아가던 두 사람은 뜻밖의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다산보다 열 살이나 어렸던 혜장선사가 1811년 39세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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