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론토크라시(gerontocracy)는 노인 정치 또는 노인이 지배하는 사회 체제를 말한다. 고대 로마제국의 원로원, 중세 기독교의 성직자 사회,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산당 치하에서 기승을 부렸다. 최근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미국에서는 제도를 통해 권장하기도 한다. 대법관을 종신직으로 90세가 넘어서도 현직에서 활동하게 하고, 의회에서는 선임자 우대 원칙으로 인해 나이가 들지 않으면 사실상 상임위원장이 되기 어렵다. 미국 민주당의 대표 주자들이 대부분 고령이어서 다음 대선을 걱정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정부에서는 더욱 빈번하게 고령의 인사가 요직에 중용되고 있다. 임용 당시의 연령으로만 보더라도 이인호 KBS 이사장 79세, 쟈니윤 관광공사 상임감사 79세, 유흥수 주일 대사 77세, 이병호 신임 국정원장 75세, 이명재 민정특보 72세, 이병기 신임 비서실장 68세다. 비공식 자문 그룹으로 거론되는 ‘7인회’는 거의 모두 70대 후반이거나 80대 초반이다.
노인이 국정 운영의 중추를 형성할 경우 파급 효과는 단순히 공직 사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같은 연배의 사회 각계 지도층과 연계되면서 사회 전 영역을 노인 중심 네트워크로 전환한다. 경험과 경륜을 중시하고 안정적인 사회질서 유지를 강조하던 시대에는 매우 바람직한 일로 여겨졌다. 플라톤은 일찍이 50세 이전에는 공직 진출을 삼가라고 조언했을 정도다. 노인을 지식과 지혜의 보고로 간주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노인의 공직 진출이 빈발하는 이유는 고령화사회의 도래와 무관치 않다. 노인인구의 사회 구성 비율이 높아지면서 평균 연령의 최빈값 수준이 높아지게 됐다. 두꺼워진 노인연령층을 대변해야 하는 세대 대표 수요도 생겼다. 75세쯤은 돼야 노인이라는 신(新)노년 개념에서 보듯이 노인이 과거와는 달리 여전히 육체적으로 활발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점도 노인중심사회 등장의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제론토크라시는 그 본질적 특성상 역동성·유연성·신속성·가변성 및 미래 지향성을 특징으로 하는 오늘날의 정보사회 구조와 잘 부합하지 않는다. 창조와 혁신 같은 현 정부의 국정운영지표와도 많은 면에서 충돌적 요소를 지녔다. 사회구조가 급변하는 곳에서는 구시대의 생활양식을 선호하는 복고주의로 간주되면서 자칫 가치관 갈등을 유발할 위험성도 있다. 우리의 경우 권위주의 패러다임 부활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적잖았다. 그동안 줄기차게 제기돼 온 정부 요직의 인적 쇄신에 대한 요구는 바로 이 점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세대 갈등을 방치하거나 부추기게 된다는 데 있다. 권력적으로 노인이 과대 대표되고 청년이 과소 대표되면서 청년의 사회적 소외가 심해지는 문제를 낳는다.
이는 단지 세대 갈등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탈리아가 잘 보여준다. 이탈리아는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3번째 경제 대국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심각한 경제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유럽 국가 중 개인소득 감소율이 가장 높고 청년실업률은 40%에 이른다. 생산성이 후퇴하고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노인 중심의 권력 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는 이가 적지 않다. 조르조 나폴리타노 대통령이 지난 1월 90세로 퇴임했고, 직전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대통령은 86세에 임기를 마쳤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2011년 사임 당시 75세였다. 은행원 평균연령이 67세이고 대학교수는 63세다. 세계 3대 노인국 중 하나다. 그 결과 노인 중심 연금 지출 규모가 지나치게 커졌고, 환경보존·기술개발·재정지출 등에서 단기적 시관(時觀)에 빠져 미래 지향적인 투자와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평가다.
세대 재생력 상실이 혁신과 경쟁력 유실로 이어졌다는 진단과 다름없다. 사회복지 논쟁과 디플레이션 우려가 함께 진행되고 있는 우리 사회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한국형 제론토크라시’에 대응할 보완적 조치의 필요성이 커지는 이유다. 재정 지출에서 세대 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세대 인지 예산 제도를 도입하거나 내각이나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발에 세대별 균형을 고려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투표권을 18세로 내리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청년의 권력적 소외는 청년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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