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중국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 학생들이 찍은 사진. 앞줄 가운데가 박헌영, 두번째 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현앨리스이다. 작은 사진은 1928년경 현앨리스가 아들 정웰링턴을 안고 있는 모습.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 정병준 지음 / 돌베개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는 1921년 상하이(上海)에서 찍은 사진 한 장에서 시작한다.
사진 아랫줄 한가운데 있는 청년이 박헌영이다. 그동안 1929년 국제레닌학교 시절 각국에서 모여든 혁명가들이 함께 찍은 것으로 잘못 알려진 사진이다. 사진 2열 오른쪽 끝에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과 ‘애인’ 현앨리스가 나란히 앉아 있다. 이 사진은 30여 년 뒤 박헌영이 미국 스파이 혐의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단초가 된다.
1955년 북한이 부총리 겸 외무장관인 박헌영에게 ‘미 제국주의 고용간첩’ 및 ‘공화국 전복’ 혐의로 사형 판결을 내릴 당시, 현앨리스의 존재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꾸준한 자료 발굴과 증언으로 박헌영 사건의 실체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현앨리스는 ‘한국판 마타하리’ 또는 “이강국의 애인이었던 남한의 김수임과 대비되는 북한의 여간첩” 등 관음증의 대상으로서 대중적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김수임과 마찬가지로, 현앨리스 역시 단순하지만은 않다. 현앨리스의 삶은 광복 이후 남북한의 역사적 풍랑 속에서 마멸된, 그러나 돌이켜 기억해 둘 만한 중요한 역사적 흐름을 대변한다. 1903년 하와이 이민과 함께 시작된 ‘재미 한인 진보주의자’의 역사 말이다.
현앨리스는 1903년생으로 독립투사인 현순의 맏딸이다. 어머니 태중에서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에 이민했으며, 하와이 출생 한국인 1호로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그녀는 서울, 하와이, 일본,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로스앤젤레스, 프라하, 부다페스트, 평양으로 떠돌았는데, 이 장소들은 “한국 근현대가 세계와 마주치는 경계면”이었다. 그녀는 어떤 이유로 세상 어디에도 정착 못 하고 끊임없이 떠돌 수밖에 없었을까?
현앨리스와 박헌영은 평생 세 시기에 걸쳐 만났다. 이 만남들은 “미국, 기독교,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재미 진보주의자들이 3·1 운동을 거치면서 “사회주의에 공명”하고, 민족주의와 결합한 사회주의적 이상주의자로 활약하며, 광복 후엔 “남한 혁명운동의 민족주의적 에너지에 매료”되어 마침내 북한으로 들어가 현실 속에서 소멸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상징한다.
첫 만남은 1920년 상하이에서 이루어졌다. 사진을 찍었던 때다. 현앨리스는 이승만과 노선 대립으로 상하이로 건너와 활동하던 아버지 현순을 따라와 박헌영과 자연스레 어울렸다. 현순이 최창식, 박헌영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면서 서로 집안을 드나드는 등 친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인 사이는 아니었다. 그보다 동지에 가까웠다. 두 사람 모두 ‘3·1운동의 후예’였다. 상하이라는 이국의 공간에서 독립의 열망, 러시아혁명의 이상, 낭만적 열정이 어우러지면서 형언할 수 없이 강렬한 원체험을 형성했다. 이로부터 현앨리스는 민족주의자 아버지를 둔 평범한 여학생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열혈분자로 변신했다.
짧은 결혼생활 후 이혼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현앨리스는 가난과 싸우면서 1930년대 미국 내 진보주의 활동에 열정적으로 가담한다. 노동운동에 뛰어들고, 미국 공산당과도 깊은 관계를 맺는다. 태평양전쟁 기간에는 미군에 속해 일본과 싸웠고, 그 공을 인정받아 해방 후 미군정의 민간통신검열단 소속으로 남한으로 들어왔다. 박헌영과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러나 주한미군 내 공산주의자들과 남로당 당수 박헌영을 연결해 주고, 요주의 인물들에 대한 검열망을 와해시켰다는 혐의를 받고 곧 미국으로 추방된다. 해외에 기반을 두고 활동한 이상주의자와 국내에서 암약하면서 활동한 현실의 혁명가가 25년 만에 잠시 스치듯 만났다가 헤어진 것이다.
이후 현앨리스는 미국에서 진보신문 ‘독립’에 글을 기고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해방 조국에서 사회주의적 이상을 현실화하는 일에 참여하려고 한다. 그녀의 선택지는 또 다른 반쪽 북한이었다. 1949년 미국 시민권마저 포기하고 체코를 거쳐서 현앨리스는 북한으로 들어간다. 미국 정보기관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수상쩍은 신분의 현앨리스에게 비자를 내주고 외무성에 일자리까지 알선한 사람이 바로 북한 부총리 겸 외무장관 박헌영이다. 두 사람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역사의 시간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이며, 순간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3·1운동의 후예’로 만나 평생 이상을 위해 헌신했던 두 남녀의 호의는 끝내 비극으로 귀결된다. 북한 당국이 남로당계를 숙청할 때 현앨리스는 ‘미제 스파이’라는 조작된 퍼즐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이 된다. 저자의 말처럼, 현앨리스는 “일본제국의 신민, 미국의 시민, 남한의 국민, 북한의 공민 중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이질적이고 위험한 존재”였다. 일본의 입장에선 “위험한 좌익 혁명분자”였고, 미 군정의 눈에는 정보망을 거의 붕괴시킨 “악마적 존재”였으며, 북한의 기록으로는 “미 제국주의의 고용간첩”이었다. 그녀는 “어디에도 동화되지 않고 어디에도 귀속될 수 없는” 경계의 인간이었다.
기구(崎嶇). 하나의 높은 산을 넘었는데, 또 다른 산이 나오다. 현앨리스의 삶을 한 단어로 요약할 때 이보다 적합한 말은 찾을 수 없다. 신산했던 그녀의 삶은 남북 양쪽에서 모두 저주받은 자들의 운명을 밝히는 상징적 촛불이 된다. 책을 읽다 몇 번이고 울컥했던 것은 단지 ‘재미 한인 진보주의자’들이 맞이했던 역사의 비극 탓만은 아니다. 역사의 파도 속에서 흔적만 남겼던 그 빛이 아직도 역사의 한 가능성으로 존재함을 확인한 감격이 더해져서이다. 사실을 축적하는 꼼꼼한 고증에 덧대어 유려한 문장으로 한 인간의 비극적 아우라까지 고스란히 복원한 저자의 공로 덕분에 또다시 역사 서술의 좋은 범례가 하나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