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는 수용소가 운영될 당시 취사장에서 밥을 짓던 포로들의 모습이 재현돼 있다.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는 수용소가 운영될 당시 취사장에서 밥을 짓던 포로들의 모습이 재현돼 있다.
후박나무·풍란 등 37종 자생하는 ‘활엽수 천국’지심도는 장승포항에서 남동쪽으로 5㎞ 정도 떨어져 있는 섬으로 거제 8경 중 하나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면적이 0.36㎢, 최고높이는 97m다. 해안은 대부분 가파른 절벽이지만 민가와 밭이 있는 곳들은 비교적 평평하다.

지심도는 각종 수목이 빽빽하게 우거진 원시림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남해안 특유의 상록활엽수림이 잘 보존돼 있으며 후박나무, 소나무, 동백나무, 거제 풍란 등 37종의 식물이 자생한다. 그중 동백나무가 전체 숲의 60~70%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희귀식물인 개가시나무와 멸종위기종인 팔색조, 솔개, 흑비둘기 등이 서식한다.

이 섬에도 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지심도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현종 45년부터라고 한다. 평화롭던 섬에 시련이 닥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 일제는 이 섬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1936년 주민들을 강제로 이전시켰다. 그리고 막사, 병원, 배급소, 포대, 포진지, 탄약 창고 등을 지어 섬 전체를 요새화했다.

그 잔해는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펜션으로 쓰는 동백하우스는 주둔군을 지휘하던 책임자의 관사였다. 또 일본군배급소, 서치라이트 보관소, 대마도 쪽의 바다를 향해 구축돼 있는 포진지와 탄약고, 남쪽(해금강), 북쪽(부산·진해), 동쪽(대마도) 등이 적혀 있는 방향 지시석도 볼 수 있다.

해방이 된 뒤 주민들이 다시 들어와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서쪽 사면 11가구, 섬 중간 1가구, 북쪽 모서리에 3가구 등에 20여 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민박집을 운영하거나 밭농사 등을 짓는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1951년 초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처음 구상은 6만 명 정도를 수용 한다는 것이었지만 최종적으로 인민군 15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등 17만3000명의 포로가 수용됐다. 여자포로 300명도 포함돼 있었다. 여기에 경비를 위한 병력과 행정인원 등이 합쳐지면서, 약 10만 명이었던 거제도 인구가 금세 세 배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포로수용소 내의 갈등은 1951년 6월부터 시작됐다. 친공포로들은 수용소 내에 소위 ‘해방동맹’이라는 비밀 조직체를 만드는 것은 물론 인공기를 게양하고 인민군 복장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친공포로에 의한 대표적 반공포로 학살은 1951년 9월 17일에 일어났다. 이날 밤 친공포로 측 해방동맹본부에서는 “부산이 북한 공산군 수중에 들어 왔으며, 그 중 선봉대 1개 대대가 거제도에 상륙하여 포로들을 해방시키려고 전진 중에 있다”고 선전했다. 이와 같은 선동에 자극된 친공포로들 중 일부가 반공포로들을 운동장으로 끌어내어 타살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로 희생된 숫자는 무려 300명에 달했다.

휴전협정에 따라 본격적인 포로송환이 시작된 것은 1953년 8월 5일부터였다. 북으로 송환을 희망하는 친공포로는 대부분 거제도와 제주도에 수용되어 있었으므로, 해로와 육로를 통한 수송 작전이 전개됐다. 이 송환 작전은 한 달 넘게 계속돼 9월 6일 완료됐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포로수송이 끝나면서 폐쇄되었는데 1983년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99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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