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초판이 나온 것이 1980년이다.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사진)과 역사학자 피터 커즈닉은 그 뒤를 이어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사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12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우드로 윌슨으로 시작해 2009년 버락 오바마까지 100여 년의 미국사를 종횡무진으로 풀어낸다.
전 2권으로, 무려 10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의외로 일단 잡기만 하면 영화만큼 흥미진진하다. 비결의 한 축은 저자로 참여한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이다.
이 책은 동명의 10부작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함께 쓴 책이다. 지금도 유튜브에 ‘Oliverstones : The Untold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라고 입력하면 동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올리버 스톤은 지금껏 ‘플래툰’ ‘7월 4일생’ ‘JFK’ ‘닉슨’ 등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논쟁적인 영화를 만들어 왔다. 뉴욕대 영화과에 입학하기 전부터 소설과 시나리오를 써온 감독의 노련함이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으로 태어났다. 또 하나는 최근 공개되거나 기밀이 해제된 관련 기록과 학자들의 연구 자료 등이 방대하게 인용돼 충격적인 사실 폭로가 줄을 이어 눈을 뗄 수가 없다.
하워드 진은 1492년 황금에 눈먼 콜럼버스가 에스파뇰라 섬에서 발견한 인디언을 납치해 노예로 삼고 수족을 절단하고 살해한 사실을 서술하며 위대한 탐험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으로 미국사를 시작한다. 저자들은 미국 대통령과 최측근의 그릇된 생각이 얼마나 인류의 발전을 저해했는지를 폭로하며 시작한다. 미국의 직간접적인 영향 아래 놓인 우리로서는 그동안 몰랐던 미국의 전모는 물론이고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책을 읽다 보면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지배의 논리로 받아들인 상식이 얼마나 많았는지 깜짝 놀란다. 예컨대 1946년 3월 처칠이 했던 그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은 미·소 양 진영의 긴장 상태를 두고 나온 말이라고 배웠지만 호전적인 이 말 때문에 이후 강대국 간의 상호 존중 방식이 날아갔다. 또 맥아더가 했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는 6·25전쟁에서도 원자탄을 사용하자고 주장했다가 해임된 그의 고별사였다.
이뿐인가. 역사시간에 배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연합국이 전후 지역을 분할해 지배권을 갖는다는 비밀협약이 있었다), 원자탄이 2차 세계대전을 끝내고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 냈다는 생각은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원자탄은 군사적으로 불필요했으며 이후 미국이 핵무기를 협박용으로 쓰며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는 일이 벌어졌다), 20세기 냉전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냉전 지속의 책임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기가 막힌다.
배후에는 제국으로 군림한 미국의 욕망이 숨어 있으며 책은 그 민낯을 기록한다. 더 심각한 것은 미국은 스스로 제국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잔혹한 짓을 저질렀는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은 늘 지구상 어느 곳보다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며, 세계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관대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미국을 바라보는 한국인도 이런 주어진 역사관 속에 갇혀 있다. 그야말로 미국의 역사는 신화로 채워져 있는 셈이다.
책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했다는 “(미국은 군주제가 아니라) 공화정을 하자는 거지요. 근데, 그거, 잘 지켜야 합니다”로 끝을 맺는다. 다시 말해 워싱턴과 제퍼슨이 세운 공화국의 이념과 민주주의와 혁명에 영감을 준 이상을 하루빨리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다. 저자들은 그 이상에 가까웠던 인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냈던 헨리 W 윌러스와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인식의 대전환을 보여준 존 F 케네디에 주목한다. 이들이 무너진 후 미국은 제국의 길을 거침없이 달려왔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 독자의 눈에는 좌파 역사학자의 뒤를 따르고 있는 저자들 역시 ‘위대한 미국’이라는 신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보인다. 미국의 어둠과 실체를 본 이후, 공존과 복지, 분배와 희망의 역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결국 한국 독자의 몫이다.
한미화<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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