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직 / 부국장 겸 경제산업부장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대통령 말 한마디에 산천초목이 떤다는 말이 유행했다.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지만 그래도 대통령의 말과 국정 의지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 ‘적자생존’(대통령 말을 받아 적는 사람이 살아남는다)이라는 우스개까지 있을 정도다.

박 대통령은 지난 17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이번에야말로 비리의 뿌리를 찾아내서 그 뿌리가 움켜쥐고 있는 비리의 덩어리를 들어내야 한다. 우리 사회 각 부문에서 켜켜이 쌓여온 고질적인 부정부패에 대해서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원론적으로 당연한 말이어서 일반 국민은 무덤덤하지만 경제계는 다르다. 역대 정권에서 사정(司正) 드라이브만 걸리면 결국 기업들이 최종 표적이 됐던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이완구 국무총리가 12일 담화를 발표했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하던 경제계가 이번에는 또 어느 기업, 기업인이 다칠까 촉각을 곤두세우며 바짝 긴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검찰은 해외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는 포스코건설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캐비닛에 쌓아놨던 기업 수사자료를 차례로 꺼내 들고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경찰청·국세청·관세청·공정거래위원회·금융감독원 등 사정기관들의 몸놀림도 바빠졌다. 불법 비자금 조성, 탈세, 외환·무역비리, 부정거래행위 등 기업 관련 조사자료를 다시 펼쳐들고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이들 기관에 근무하는 한 지인은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성과를 내라고 위에서 재촉하고 있다”며 “사정기관들 간에 실적 경쟁 분위기도 있다”고 전했다.

부정부패를 걷어내고 비리 관련자를 엄벌하겠다는 데 이에 반대할 이는 없다. 경제계가 걱정하는 것은 정부가 나서서 사정의 칼을 뽑아든 배경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보니 그 불똥이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번 사정 정국에 대한 경제계와 정치권 안팎의 해석은 세 가지다. 첫째, 집권 3년차 국정 장악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승부수라는 분석이다. 둘째는 비리 척결을 명분으로 전(前) 정권을 희생양 삼아 지지도 회복을 꾀하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다. 셋째는 말 안 듣는 기업 ‘군기 잡기’용이다. 경제살리기 차원에서 정부가 거듭 요청해온 임금인상과 고용·투자확대 등에 대해 기업들이 소극적으로 대응하자 재계 길들이기 차원에서 기획사정의 칼을 빼든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이런 관측이 맞는지, 어느 방향인지, 아니면 세 측면 모두 있는지 당장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최소한 기업 몇 곳이 곤욕을 치르는 일은 피할 수 없다. 현재 검찰 수사 대상으로 언급되고 있는 기업들은 혐의 내용 대부분이 새로운 범죄행위라기보다는 이미 수년 전에 매듭지어졌다고 생각해온 사안이라는 데 주목하고 있다. 청와대와의 교감 아래 사정기관들이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지나간 자료를 다시 들춰보고 있는 게 아니냐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특히 또다시 ‘대기업 때리기’ 광풍이 몰아치는 게 아닌가 걱정한다. 지난 대통령선거 당시 표를 의식한 정치권이 ‘경제민주화’를 내세워 대기업 때리기 경쟁을 펼쳤던 트라우마에서 아직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설상가상이다.

범법행위가 있었다면 아무리 관행이었다고 하더라도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특정 기업을 타깃으로 먼지 털기 식 수사와 조사를 진행한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더욱이 결과로 말하면 되는데 국민에게 중계방송하듯 요란을 떨면 경제계 전체가 죄인처럼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경제는 심리다. 온갖 수단을 동원한 끝에 경제가 겨우 기지개를 켜는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기업의 목을 조르고 윽박지른다고 경제가 확 살아나진 않는다. 기업 하고 싶은 마음, 투자 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국부(國富)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원천인 기업이 위축되면 곧 국민의 경제고통 심화로 이어진다. 기업들에 “돈을 풀라” “채용을 늘리라”고 압박하기 전에, 기업들이 투자할 수 있도록 규제 정비는 제대로 돼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규제개혁은 돈 안 드는 투자이자, 경제 심리를 자극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매개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경제는 ‘명령’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시장을 이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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