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근이 방울을 손에 들고 눈을 감자 미동도 없는 손에서 방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공수(신의 소리를 내는 일)가 이어졌다.  김선규 기자 ufokim@
정호근이 방울을 손에 들고 눈을 감자 미동도 없는 손에서 방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공수(신의 소리를 내는 일)가 이어졌다. 김선규 기자 ufokim@
탤런트서 무속인 변신 정호근씨“모든 걸 내려놓고 운명을 따르니 삶이 편안해졌습니다.” 지난해 9월 신 내림을 받고 무속인의 길을 걷고 있는 탤런트 정호근(51)은 내림굿을 하고도 세상에 나설 엄두가 나질 않아 고민하다 ‘떳떳하게 살자. 그래야 신령들도 나를 당당하게 도와줄 거다’라는 생각을 하자 새 삶을 살아갈 용기가 났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 3월 27일 서울 성북구 정릉동 자신의 집에 차린 신당(神堂)에서 무속인 정호근을 만났다.

그를 만나러 가며 지난여름 그와 식사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그는 KBS 사극 ‘정도전’ 종영 후 쉬고 있었다. 이 드라마에서 이인임(박영규)의 최측근 임견미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그는 여러 드라마와 사극을 통해 개성 있는 연기자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는 분노에 차 있었다. 그는 “만날 떡고물 같은 역할만 한다. 떡이 아니라 거기 묻어 있는 고물 말이다”라며 “인지도는 높아졌지만 조금 올라가면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게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소리를 높였었다.

그의 화난 얼굴을 떠올리며 신당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전과 달랐다. 하루 종일 수십 명의 손님을 맞아 지쳐 있을 저녁 시간인데도 활력이 넘쳤고, 표정은 온화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 신당의 분위기도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얼굴이 정말 편안해 보인다’고 말을 건네자 그는 “정말이요? 달라진 게 느껴져요?”라고 되물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가족사를 소개하며 말을 열었다.

“친할머니가 만신(萬神)이었어요. 팔 남매가 모두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시다 신 내림을 받게 됐죠. 저도 어린 시절부터 신기가 있었고요. 아홉 살 때부터 신이 제게 온 것 같아요. 비가 오면 밖으로 나가 춤을 췄고, 아무 데서나 웃으면서 소변을 봤어요. 부모님은 그런 저를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그런 기를 노래로 발산했어요. KBS ‘누가 누가 잘하나’에 나가 연말 장원전까지 진출했고, 이후 ‘타이거 마스크’, ‘우주의 왕자 빠삐’ 등 만화영화 주제가를 불렀어요. 배우가 아닌 가수로 연예계에 데뷔한 거죠(웃음).”

그의 집은 꽤 부유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10대 때 아버지 사업이 망했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자 할머니가 만신이 된 것을 무섭게 생각하던 아버지도 굿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부터 사람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며 “지나가는 연인들에게 ‘그 사람 만나지 마!’라고 호통을 쳤고, 한참 잘 나가던 사람에게 ‘넌 곧 망할 거야’라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1983년 MBC 탤런트 공채 17기로 합격해 연기를 시작한 후에도 그의 신기는 계속됐다. 그가 자신의 최고 배역으로 꼽는 풍발을 연기한 KBS 1TV 사극 ‘광개토대왕’에 출연할 때 그의 신기는 극에 달했다.

“풍발을 연기하며 ‘내 몸에 다른 혼이 들어와 있구나’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제 앞에 서있던 동료 배우가 제 뒤에서 덩치 큰 장군이 저를 안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또 연극무대에서도 접신(接神) 된 느낌을 받았어요. 3∼4페이지 분량의 긴 독백을 하며 흥이 나서 대사가 줄줄 나왔어요. 몸에서 전율이 느껴졌고요. 관객들은 그런 저를 보고 작품에 몰입했죠. 연예인들은 다들 준 무당이에요. 그러다 조금 튀면 저처럼 되는 거고요.”

그의 아내와 세 자녀는 모두 미국 텍사스에서 살고 있다. 지난해 그는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러 미국에 갔다가 심한 복통을 앓았다. 그 후 귀국해서도 배앓이가 낫지 않았고, 3개월 사이 체중이 10㎏이나 줄었다. 그러던 중 꿈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타났다.

“할아버지가 제게 2년 후에 죽을 거라고 하셨어요. 꿈에서 깨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죠. 배는 계속 아팠고요. ‘나 왜 이러는 거지?’, ‘이러다 정말 죽는 거 아냐?’라고 중얼거렸어요. 평소에도 혼잣말을 많이 해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평소 알고 지내던 만신을 찾아갔어요. 지금은 신어머니가 되신 그분은 제가 방송에 나가 무속신앙을 좋게 얘기하는 걸 보고 제 팬이 됐대요. 어느 모임에서 우연히 그분과 합석을 하게 됐고, 그 후 제가 배우로 성공할 수 있도록 빌어주셨어요. 몸이 아프다고 찾아간 저를 보고 펑펑 우시더라고요.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신병(神病)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살아야겠기에 무조건 신 내림을 받았어요. 그래도 배앓이가 낫질 않다가 불림(신의 말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당하면서 멈췄어요.”

그렇게 무속인이 됐지만 그의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당당하게 세상으로 나가느냐, 아니면 숨어서 살아가느냐’. 3개월간 냉가슴을 앓던 그는 친하게 지내던 잡지사 기자에게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았고, 올 초부터 살던 집에 신당을 차렸다.

“처음에는 ‘가족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배우 인생은 이제 끝인 건가’ 여러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어요. 그러다 욕심을 버리고, 다 내려놓으니 용기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신당도 다른 곳이 아닌 살던 집에 모신 거예요. 잡지에 기사가 난 후 제 이름이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오르더군요. 30년 넘게 연기하며 한 번도 검색어에 오른 적이 없었는데 말이에요.”

가족들에게 알리는 일은 더 어려웠다. 전전긍긍하던 그는 신당을 열기 일주일 전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말할 수는 없었어요. ‘산에 가서 사람들에게 미래가 보인다고 하니까 다들 뒤집어지더라’고 했더니 아내가 ‘제발 그런 짓 좀 하지 마’라고 하더라고요. 그냥 끊었어요. 다음 날엔 ‘술 마시며 마구 떠들었더니 사람들이 신기가 있다고 하네’라고 슬쩍 돌려 말했더니 ‘배우나 열심히 하세요’란 말이 돌아왔고요. 사흘째 되던 날 ‘사실 나 신 내림 받았어’라고 솔직히 말했어요. 엉엉 울더니 전화를 끊더라고요. 그러고는 다시 전화가 왔어요. ‘가족들이 손가락질받는 건 생각 안 하냐’, ‘왜 자기 자신만 생각 하냐’고 따지더군요. 저도 화가 나서 소리쳤죠. ‘내가 죄지었어? 도둑질을 한 거야? 물릴 수 없으니 내 갈길 갈게’.”

5일 후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날은 아들과 딸들을 차례차례 바꿔주며 그를 응원했다. 그는 수화기를 든 채로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렸다고 했다.

“밝은 목소리로 말하더군요. ‘주변 사람들이 우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 그래도 상관없어. 그 사람들이 우리 힘들 때 도와준 적 없잖아. 다 이해할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봐’라고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아들놈은 ‘아빠 무당 된 거야? 방울도 흔들어? 그래 아빠가 하고 싶으면 해야지. 근데 멋있게 해야 돼’라고 말해줬고, 딸들도 저를 응원해줬어요. 그제야 처음으로 마음이 편해졌어요. 자신감도 생겼고요.”

신당을 차린 지 3개월이 지난 그에게 ‘지금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냐’고 물었다.

“고민은 없어요. 잠도 잘 오고요. 요즘은 ‘내가 얼마나 큰 무당이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요. 가족들을 미국에 보낸 지 12년이 돼서 빚도 많지만 돈벌이를 생각하진 않아요. 신이 주신 녹(祿)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면 다 말아먹게 돼요. 그런 무당들 많이 봤어요. 물론 당분간 드라마 출연은 할 수 없겠죠. 그래도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많이 불러줘요. 그동안 연기하며 아등바등 살아왔지만 이젠 든든한 ‘빽’이 생겼으니 무슨 걱정이겠어요. 다 잘 될 거라 믿어요.”

인터뷰 = 김구철 부장대우 (문화부) kc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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