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억달러 중 2억달러 공짜 아냐… 이자 받으며 일본 이득에 기여 韓경제개발 토대 주장은 엉터리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일궈낼 수 있었던 ‘마중물’은 일본이 아니라 미국에서 나왔다. 특히 한국의 경제개발 기초가 됐던 박정희정부의 경제개발 계획이 시작된 1962년부터 10년간 한국이 도입한 해외 공공차관의 61%가 미국이 지원한 원조금이었다. 일본이 최근 주장하는 “일본이 한국 및 아시아 경제개발을 도왔다”는 논리는 엉터리인 셈이다. 더구나 당시 일본의 한국 유상차관 제공은 경제적 부담이 커졌던 미국의 압력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한일청구권 협정에서 어떻게든 배상금을 깎으려고 애썼던 일본이었다.

2일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 따르면 한국은 1945년 해방 이후 1999년까지 총 127억7630만 달러의 대외 원조를 받았다. 주요 공여 국가는 미국이 55억4235만 달러로 가장 많았고, 이어 일본(50억5181만 달러)과 독일(8억3493만 달러), 프랑스(1억146만 달러) 순이었다.

단체로는 6·25 한국전쟁 당시 설치된 유엔군 한국민간구호처(CRIK), 유엔 한국재건단(UNKRA) 등으로부터 총 9억6831만 달러를 원조받았다.

외형상 숫자로만 보면 일본이 미국에 버금가는 원조로 한국경제 재건을 도운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내용을 조금만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르다. 해방 이후 무상원조의 70%가 1945∼1960년에 들어왔고 이 기간에 경제재건의 핵심이 된 물자원조 및 산업설비 투자가 이뤄졌는데, 유엔으로부터의 일부 원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였다.

미국은 1948년 한미 원조협정(ECA), 1952년 한미 상호방위원조협정(SEC), 1952년 한미 경제조정협정(마이어 협정) 등을 줄줄이 체결한 뒤 전시긴급구제계획(SEC)과 대외원조행정기구(FOA), 국제협조처(ICA) 등 다양한 채널로 원조를 제공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부터 10년간 해외 공공차관 통계에서도 총 11억9300만 달러의 61%인 7억2300만 달러가 미국에서 유입된 것이 확인된다. 또 1970년대에는 무상원조가 공공차관·상업차관 형태로 주로 바뀌는데, 여기서도 미국 개발차관(AID)이 가장 많았으며 1959년 개발차관으로 처음 설립된 회사가 동양시멘트다.

또 무상원조와 유상원조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공여받은 유·무상 비율은 유상 50억여 달러, 무상 70억여 달러다. 무상원조와 달리 차관 형태로 들여오는 유상원조는 오히려 공여국의 이득에 기여한다는 비판이 있는데, 일본이 유상원조를 가장 많이 하는 국가 중 하나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일본이 제공한 배상금 5억 달러 중에서 유상 차관이 2억 달러에 달하는 것도 일본 기업의 진출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일본 배상금 5억 중 1억2000만 달러가 투입된 포항제철 건설도 일본은 농업용 자금이라면서 용도 변경을 반대했으며, 소양강댐 건설 자금 290억 원 중 104억 원(2160만 달러)은 일본이 이자를 받는 유상차관이었다. 무상원조마저도 현금지급이 아니라 일본의 플랜트를 구입하는 데 주로 사용하도록 용도를 지정해놨다. 게다가 일본은 그나마도 억지주장을 하면서 배상금을 깎으려고 했다.

일본이 한반도에 남겨둔 재산이 많다면서 한국에 보상금을 요구하는가 하면, 원양어선 도입자금도 삭감을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은 동남아의 다른 피해국과도 비교해도 한국에 매우 인색했다.

신보영 기자 boyoung22@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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