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이 백제 유적지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왕궁터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도 이견이 나오고 있다. 문화재청이 백제 초기 왕성으로 추정된다며 적극적 정책을 펴온 만큼 왕궁터인지 아닌지에 대한 부분도 풍납토성을 둘러싼 갈등의 중요한 축이다.
풍납토성이 백제 왕궁터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측의 대표격인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재산권이 침해받는다고 해서 우리의 역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면서 “삼국사기에는 493년 동안 서울에 한성백제가 있었다는 내용이 분명히 있고, 이를 증명할 만한 유적이 풍납동 이외에는 안 나오고 있는데 자연환경이나 입지 조건상 500여 년 동안 장기적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이곳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이어 “1991년 풍납토성 아파트 공사장에서 기와와 토기 조각을 직접 발견했고 이후 10여 년 동안 보고서 16권 분량의 엄청난 유물을 발견했다”면서 “삼국사기에도 왕궁에만 기와를 지어왔다고 나와 있는데 전 구역에서 기와와 전족들이 나왔으며 2006년에는 미래마을에서 임금이 다니는 길인 어도와 함께 우물도 나왔다”고 주장했다. 문화재청 또한 이 교수와 같은 입장이다.
반면 노출되기 쉬운 지역에 위치한 데다 규모가 작아 왕궁터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한종섭 백제문화연구회 회장은 문화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풍납토성은 한강 상류에 댐이 없을 때 비가 오면 침식되는 침수지대”라면서 “유물들도 지하 4∼5m 밑에서 발견됐는데 모두 침수돼 매몰된 것이며 왕궁터치고는 보안이 되지 않고 군사적으로 노출되는 곳에 위치한다”고 분석했다. 한 회장은 “풍납토성은 72만7000여㎡(22만 평)로 왕궁이 되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다”면서 “왕궁 근처에는 귀족들이 살아 규모가 최소한 1980여㎡(600만 평) 이상은 돼야한다”고 말했다.
이희진 한국항공대 외래교수도 “왕성이라면 적어도 왕궁 건물의 일부가 나오거나 대형사찰 등이 나와야 하는데 발견된 것이 없고 왕성에서만 나올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고서정 기자 himsgo@munhwa.com
풍납토성이 백제 왕궁터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측의 대표격인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재산권이 침해받는다고 해서 우리의 역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면서 “삼국사기에는 493년 동안 서울에 한성백제가 있었다는 내용이 분명히 있고, 이를 증명할 만한 유적이 풍납동 이외에는 안 나오고 있는데 자연환경이나 입지 조건상 500여 년 동안 장기적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이곳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이어 “1991년 풍납토성 아파트 공사장에서 기와와 토기 조각을 직접 발견했고 이후 10여 년 동안 보고서 16권 분량의 엄청난 유물을 발견했다”면서 “삼국사기에도 왕궁에만 기와를 지어왔다고 나와 있는데 전 구역에서 기와와 전족들이 나왔으며 2006년에는 미래마을에서 임금이 다니는 길인 어도와 함께 우물도 나왔다”고 주장했다. 문화재청 또한 이 교수와 같은 입장이다.
반면 노출되기 쉬운 지역에 위치한 데다 규모가 작아 왕궁터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한종섭 백제문화연구회 회장은 문화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풍납토성은 한강 상류에 댐이 없을 때 비가 오면 침식되는 침수지대”라면서 “유물들도 지하 4∼5m 밑에서 발견됐는데 모두 침수돼 매몰된 것이며 왕궁터치고는 보안이 되지 않고 군사적으로 노출되는 곳에 위치한다”고 분석했다. 한 회장은 “풍납토성은 72만7000여㎡(22만 평)로 왕궁이 되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다”면서 “왕궁 근처에는 귀족들이 살아 규모가 최소한 1980여㎡(600만 평) 이상은 돼야한다”고 말했다.
이희진 한국항공대 외래교수도 “왕성이라면 적어도 왕궁 건물의 일부가 나오거나 대형사찰 등이 나와야 하는데 발견된 것이 없고 왕성에서만 나올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고서정 기자 himsgo@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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