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선 / 문화부장

일본 왕가(王家)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역사인식 퇴행에 제동을 걸고 싶어한다는 시각이 있다. 한국과 중국의 일부 언론이 최근 퍼트리고 있다.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일본은 과거를 겸허히 되돌아봐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 근거다. 아키히토(明仁) 일왕도 올해 신년사에서 비슷한 말을 했단다. “만주사변으로 시작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워야 한다.” 과연 일 왕가의 이런 말들이 우익의 ‘보통국가론’, 즉 군(軍) 재무장을 명백히 반대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일왕은 일본에서 ‘천황’으로 숭앙받는다. 정치적 실권이 없다고 해도 여전히 신적인 존재다. 일본인의 내면을 잘 아는 호사카 유지 세종대 독도연구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 문제에 대응하면서 ‘천황’까지 건드리지 말라.” 일본 국민 전체의 감정을 자극하지 말라는 그의 조언은 옳지만, 역사 문제의 본질에 천황이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천황은 일 제국주의의 구심점이다. 근대 일본이 국민 국가로 출발하는 시점에서 일군의 사상가들이 천황 신화를 만들었다. 이 신화는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사상적 기반을 이뤘다. 아베 정권이 일본인의 ‘제국 의식’을 작동시켜 부국강병을 꾀할 때, 그 기제는 천황이다. 그 존재 자체가 ‘제국 일본’의 상징이다. 일 왕가가 평화 국가를 말하는 것이 헛된 수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일왕과 왕세자의 진심을 폄훼할 필요는 없다. 자신들로 인해 이웃 나라가 참혹하게 고통받은 것에 대해 죄스럽게 여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베 정권의 우경화를 막을 수 있다고 믿지 못한다. 그런 기대는 한·일 과거사 갈등에서 미국이 우리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은 안이한 인식이다.

미국은 전후 일본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맺을 때 일 천황제를 유지시켰다. 당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고 한다. 천황에게 전범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물리쳐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천황에 대한 일본인들의 존경심을 고려했던 것도 한 요인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강변하는 핵심적 근거다. 미국이 독도 문제에서 한국이 아닌 일본 편을 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 국무부 차관보인 딘 러스크가 당사국들에 보낸 외교 서한을 보면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의 견해에 연합국의 다른 나라들이 합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한의 내용이 조약의 결론이라고 볼 수 없다. 국제법적으로 전혀 효력이 없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당시 미국의 모습은 국제 관계의 비정함을 새기게 한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사극 ‘징비록’에서 보는 명나라의 행태와 닮았다. 임진왜란을 종식시키는 강화 회담에서 명나라는 일본과 함께 조선 땅을 나눠 갖는 논의를 비밀리에 진행한다. 조선의 대신 류성룡은 명나라의 조선 할지론(割地論)을 되돌리기 위해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그런 조선을 명나라는 한껏 능멸했다. 류성룡으로서는 그 수모가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후세에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남겼다. ‘유사시 믿을 만한 후원국(동맹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류성룡의 당부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미국이 독도 등의 문제에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섭섭히 여길 까닭이 없다. 미국은 자신의 전략적 이해에 충실한 것일 뿐이다. 그들에게 우리가 더 필요하고, 더 가까운 동맹임을 끊임없이 인식시켜야 한다.

일본은 내각에 ‘영토주권 대책 기획조정실’을 만들어 각국에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홍보를 집요하게 펼쳐왔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정부의 대응은 지나치게 수세적이었다. 미 국무부 영사국 사이트에 독도가 일 영토로 표기됐던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일본의 독도 도발은 계획적, 단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들이 도발할 때마다 우리 정부는 화를 내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대외용이기보다는 대내용인 듯한 느낌을 준다. 파문이 진정되면 국민이 잊어주길 바라는 꼴이다. 그러나 이 상황이 끝나는 시기는 요원하다. 일본이 천황제를 유지하는 한 ‘제국 일본’의 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베가 물러나면 또 다른 아베가 나타날 것이다. 21세기 역사 전쟁에서 이기려면 길게 내다보고 쉼 없이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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