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명 / 소설가

4월이 되자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지난 1년 끈질기게 시달려온 참담한 기억의 원류 속에 다시 들어섰다는 것을. 멀쩡하던 곳이 갑자기 쑤시거나 저렸고 지병으로 원래 아프던 곳은 더 쑤시고 저렸다. 그러더니 곧 마음의 증상들이 뒤따랐다. 사는 동네 어디서고 갖가지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소생의 환희를 과시하는데 그것이 그냥 어여쁜 게 아니라 서러운 감정을 수반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또 그 나무들 위를 날아다니는 직박구리나 참새 따위 흔한 텃새들의 지저귐조차 그냥 단순한 새소리가 아니라 뭔가를 호소하는 듯 들려 공연히 신경이 쓰였다. 이쯤 되면 정신의학에서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으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도 싶다. 내가 이러니 그 증상이 발원한 사태의 직접 피해자들은 어느 정도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사실 인간은 자기보호 본능에 충실한 존재여서 부끄러움이나 뻔뻔함을 무릅쓰고라도 남이 겪는 고통의 파장을 비켜가고 싶어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차라리 그렇게 본성대로 하는 편이 나을 텐데 뭘 도와준다고 제멋대로 아프고 과민해지고 하는지…, 딱한 걸 넘어 짜증스럽기조차 하다. 버릴 수도, 버려서도 안 될 기억이지만 인제 그만 놓여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망각이란 게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걸 모르지 않았지만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음의 멍에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새삼 알아가는 요즈음이다. 어떤 상황이나 존재를 잊을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을 정신적으로 떠날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것과의 심리적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도 될 것이다. 문득, 한동안 잊고 지낸 시 하나가 떠올랐다.

‘모든 이별을 앞지르라,

마치 그것이 방금 지나간 겨울처럼

이미 당신 뒤에 있기라도 한 듯이.

겨울 중에는 너무 끝없는 겨울도 있어

오직 겨울을 초월함으로써만

당신 가슴은 살아남을 수 있으리니.’

이것은 릴케의 시 ‘오르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에 나오는 구절이다. 오래전 문학보다는 종교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시절, 문학서가 아닌 어떤 신학서의 주해(註解)에서 그 시구를 만났다. 나는 그것의 신비로운 느낌이 좋아 뜻도 잘 모르면서 참 오랫동안 마음 갈피에 지녀 왔다.

내가 그 책을 번역한 인연으로 만나보기도 했던 저자 스티븐 미첼은 우리 불교계의 큰 어른이셨던 고(故) 숭산 스님 문하에서 한때 선(禪)을 공부했던 영성문학가이다. 그런 그가 예수와 석가의 정신적 탈바꿈에 대해 논하는 과정에서 위의 시를 인용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도저히 떠나지 못할 상황에 부닥쳐 있다면 우리는 떠남 그 자체를 사랑의 행위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릴케가 말했듯이 ‘모든 이별을 앞지르게’ 된다.”

이어 그는 한 본보기로 고타마 싯다르타가 출가하던 밤 광경을 제시했다.

“고타마가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삶과 죽음의 엄청난 의문을 풀기 위해 떠날 각오를 하고는 잠든 아내의 뺨에 마지막 입맞춤을 하는 그 순간은 얼마나 통절한가! 그러나 그가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며, 아내를 포함한 수많은 타자를 깨우치도록 도와줄 수 없었을 것이다.”

엊그제 낡은 책에서 이 구절을 되찾아 읽으면서 나는 가슴을 쳤다.

그랬구나! 릴케의 권면을 새롭게 만나면서 나는 내 증상에 대해 시의적절한 진단을 내리게 되었다. 오랜 시간 가슴에 품어온 그 시구의 지혜를 나는 참으로 어긋난 방식으로 적용하고 있었구나! 이별의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미리 이별을 능동적으로 감행하라고 말하는 그 엄청난 이야기…. 그것은 내 안에 지난 한 해 국가적 재난의 비극에 투사돼 작동해 온 실존적 병리가 있음을 환기시켰다. 나는 이별이 두려워 이미 이별을 겪은 양 나 자신을 기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은 언제라도 나 자신 또는 소중한 이들에게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덮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강제할 수 있다…. 사실 이 두려움은 내 심연에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것이었는데, 지난 4월의 참극을 목격한 이후 그 피해자들이 나의 불운을 대신한 것처럼 느껴지면서 죄의식과 함께 ‘증상’들이 생겨났다. 이를 두고 내 마음속에서 릴케의 권면이 조근조근 이어졌다.

‘그 일은 당신 개인의 일이 아니랍니다. 당신을 포함한 모두의 일이랍니다. 모두의 일에는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당신은 그 일에 자신을 과도하게 이입해왔습니다. 그래 가지곤 당신 자신은 물론,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상황에서 발짝을 떼어야 모두의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지금 떠나십시오. 당신의 겨울을 떠나 모두의 겨울 속으로. 당신 앞에 펼쳐질 모두의 겨울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겨울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당신만의 겨울에서 놓여난다면 모두의 그 겨울도 조금 짧아질지 모릅니다….’

어제는 세월호 참사 1주기가 되는 날이었고 이 자성적인 글이 세상에 나가는 날은 바로 오늘이다. 참사 1주기를 앞둔 날 안산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모두의 겨울이 조금이라도 짧아지도록 하는 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되었다. 이제 나의 겨울을 떠나련다. 이미 그것을 충분히 살아낸 것처럼. 봄비가 다녀가셨다. 청초한 꽃잎들이 보석 같은 빗방울을 아롱아롱 머금었다. 이미 자신들의 겨울을 살아낸 꽃들은 다만 아름답다. 더 이상 서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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