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 괴산 산막이옛길
길은 풍경을 완성한다. 아무리 삭막한 풍경이라도 길 하나가 들어서는 순간 온기가 깃들기 마련이다.
길은 그리움의 뿌리다. 꼬리를 물며 나지막한 산을 넘어가는 오솔길은, 머릿속에 그리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아련한지. 길은 사람과 대지가 만나서 나누는 교감의 흔적이다. 길은 또 스스로 망각하는 존재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순간, 빠르게 흔적을 지워 다시 산이 되고 들이 되고 풀과 꽃을 키운다. 그렇게 지워진 길들이 수없이 많다.
잃어버렸던 길을 다시 찾아 걷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전국적으로 걷기 열풍이 불면서부터였다. 충북 괴산의 산막이옛길도 그렇게 다시 길로 돌아왔다.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 마을에서 산막이 마을까지 총 4㎞의 옛길. 흔적만 남아 이름조차 희미했던 길을 미술품 복원하듯 살려 걷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불렀다. 그리고 몇 년 만에 ‘걷기 명소’라는 이름을 얻었다.
산으로 가로막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뜻에서 산막이길이라 불렀다는 오지의 길을 도시 사람들은 왜 찾아가는 것일까?
#산막이옛길 = 사오랑 마을을 뒤로 하고 숲으로 든다. 자연 속을 걷는다는 것은 자연에 동화되는 과정이다. 스스로 숲이 되어 상처를 핥는 행위다. 이른 아침이라서 앞서 걷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호수가 저만치 반짝, 얼굴을 드러낸다. 차돌바위 나루를 지나면서 산길이 시작된다.
맨 먼저 만나는 것은 산막이옛길 26개 명소 중 하나라는 고인돌쉼터와 연리지.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연리지는 남녀 사이의 사랑 혹은 부부애를 상징한다. 이곳의 연리지는 두 그루의 나무가 완벽하게 한 몸이 되었다가 또 각자 허공에 길을 내고 있다. 각기 태어나서 함께 살다, 헤어지고… 사람살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이 이뤄진다는 말 때문인지 젊은 여인들은 그 앞에 서서 사진을 찍기 바쁘다.
여기서부터는 낮은 돌담길이다. 돌담이라는 말을 입 안에 넣고 굴리면, 어릴 적 먹던 사탕처럼 달콤한 느낌이 맴돈다. 여운을 즐기며 천천히 걷는다. 소나무동산을 지나면 첫 번째 전망대가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막 깨어나는 아침 호수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특별한 무엇이 있다. 순정만화에 나오는 소녀의 눈처럼 깊고 푸르되 현실감은 조금 떨어지는 풍경이다.
호수와 숲 사이를 걷는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이른 아침의 숲은 활기가 가득하다. 밤에 뭍으로 올라온 물의 정령들은 때로는 안개로, 때로는 바람으로 숲을 헤치고 다녔을 것이다. 산과 호수는 밤마다 그렇게 밀회하듯 만난다.
그리하여 숲은 윤택해지고 호수 역시 푸른빛으로 깊어져 간다. 나는 그 덕에 상쾌한 걸음을 얻는다.

수십 명의 40∼50대 여성들이 부지런히 앞질러가더니 계곡의 출렁다리 앞에서 꺄악! 꺄약! 비명을 지른다. 그러면서도 포기하는 사람은 없다. 기다시피 건너면서도 즐거운 모양이다. 다리를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동심까지 닿은 것이다. 그녀들이 모두 건너가기를 기다리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아서 우회하는 언덕길을 택한다. 그곳에는 소위 ‘19금’이라는 정사목(情事木)이 있다. 이름대로 두 소나무가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산막이옛길은 이처럼 곳곳에 이야깃거리를 숨겨놓았다. 길을 되찾으면서 스토리텔링도 함께 개발한 덕이다.
숲은 길에게 순순히 앞섶을 연다. 수십 년 묵었음 직한 다래 넝쿨이 엉켜 마치 원시림을 연상시키지만 걷기에는 조금도 불편하지 않다. 말 그대로 ‘걸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갈 수 있는 길이다. 흙길보다는 ‘덱’이라고 부르는 나무받침 구간이 많은 것이 조금 아쉽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연을 덜 훼손하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감수할 수밖에 없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등잔봉에 오르는 등산로도 나온다. 등잔봉 능선에 서면 괴산호 한가운데 자리잡은 한반도 지형이 펼쳐진다.

연꽃이 핀다는 연화담을 지나, 세상의 근심 걱정을 모두 잊는다는 망세루에 오른다. 바위 위에 지은 이 정자는 호수 양쪽을 모두 볼 수 있을 만큼 전망이 좋다. 망세루에 선 김에 도시에서 지고 온 근심 보따리들을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아무리 자주 내려놓아도 근심은 빈집의 먼지처럼 쌓이기 마련이다. 상처 역시 가실 날이 없다. 그 상처를 낫게 하는 손길은 결코 밖에서 오지 않는다. 스스로의 손으로 어루만지고 치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자연을 찾는 것이다. 자연은 만신창이가 된 마음을 아무 말 없이 끌어안아준다.
1950년대까지 호랑이가 살았다는 호랑이굴과 매바위, 그리고 여우비 바위굴을 지나 앉은뱅이 약수에 닿는다. 산막이옛길의 유일한 식수다. 옛날에 앉은뱅이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벌떡 일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여름이면 주기적으로 찬바람이 내려온다는 얼음바람골을 거쳐 조금 걸으니 호수전망대에 닿는다. 산막이옛길의 중간을 넘어선 셈이다. 이곳에는 넓은 쉼터를 마련해 놓았다. 마치 공원의 야외카페 같다.
먼저 온 사람들이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있다. 누구에게도 시간에 매어있는 표정은 없다. 이런 곳까지 와서 시간에 쫓기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시간을 충분히 준비해서 오는 것도 지혜다. 도시의 시간은 도시에 맡겨두면 된다. 이곳은 호수가 생기기 전에 산의 8분 능선쯤이었던 곳이라, 계절도 조금씩 늦게 오고 간다. 나무 아래 앉아 강물에 시선을 던진다. 물에 발을 담그고 놀던 산그림자가 물 속으로 풍덩 몸을 담근다. 호수 건너편 산자락의 과수원에는 나무들이 꽃을 피워내느라고 분주하다. 길과 호수, 과수원이 어울린 풍경은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나른한 행복감이 전신을 흐른다.
이제 길의 종점이 그리 멀지 않다. 괴음정과 ‘공포’의 고공전망대를 지나고 마흔고개를 넘어 모퉁이를 돌아가니 진달래능선이 나온다. 진달래들이 산 하나를 통째로 태워보겠다고 작심이라도 한 듯 붉게 타오르고 있다. 저만치 솔밭 아래로 산막이 나루가 보인다. 이곳에서 배를 타면 길 입구로 다시 돌아간다. 나루터는 마을 하나와 머리를 잇대고 있다. 바로 산막이옛길의 종점인 산막이 마을이다. 언뜻 헤아려보니 열 가구 남짓. 대부분 음식점이나 민박 간판을 달았다.

내친 김에 조금 더 걷기로 한다. 여기서 상류 쪽으로 더 가면 산막이옛길의 연장 길인 ‘초록길’이다. 마을을 지나다가 수월정(水月亭)이라는 현판을 단 뜻밖의 고가(古家)와 만난다.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학자였던 노수신(盧守愼)이 을사사화로 유배 와서 거처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는 훗날 영의정까지 올랐다. 이 집은 원래 연하동에 있었으나 1957년 괴산댐을 건설하면서 수몰 위기에 처하자 이 자리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길을 가다가 깊은 산중에서 느닷없이 만나는 옛사람들의 자취는 남다른 감회를 준다.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걷는다.
초록길은 인공의 흔적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길이다. 발을 통해 만나는 부드러운 흙은 전신에 행복감을 선물한다. 걷는 사람들도 대부분 산막이 나루에서 돌아가기 때문에 고즈넉한 맛이 그만이다. 지천으로 핀 진달래들이 어서 오라고 손을 흔든다. 이곳에는 길 따라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는 곳으로 길이 간다.
마냥 더 걷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삼신바위 앞에서 걸음을 돌린다. 산막이 나루로 돌아오니 마침 유람선이 대기하고 있다. 배 위에서는 산막이옛길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길이 산허리에 ‘촉(蜀)나라의 잔도(棧道)’처럼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다. 가까이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들이 조금 떨어지니 온전히 눈에 들어온다. 사람도 조금 떨어져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뱃전에 서서 스쳐가는 풍경을 찬찬히 담는다. 품에 봄을 가득 안은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다.
#그밖의 가볼 만한 곳 = 괴산에서는 오래된 집들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산막이옛길에서 내려오다 만나는 성산마을에는 김기응 가옥이 있다. 이 집은 ‘잘 사는 일반 백성’ 가옥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1900년대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특히 공간 구성과 화려한 외벽장식이 전통 상류주택의 정수를 보여준다. 구조는 바깥채 한가운데에 솟을대문을 두고 좌우로 행랑채를 두었다. 또 바깥마당에서 담을 쌓아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했다. 지금도 주인이 거주하고 있어서 사람살이의 온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홍범식 고택은 1910년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자결한 홍범식 금산군수가 살았던 집이다. 1730년쯤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 중부지방 양반 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홍범식보다 더 많이 이름이 알려진 이가 바로 그의 아들 벽초 홍명희다. 임꺽정전을 쓴 그는 1919년 3월 19일 이 집에서 충청북도 최초의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미로에 빠진 느낌이 들 정도로 집이 크다. 꽃 피는 계절에는 뒤뜰이 무척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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