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선 / 사회부장

“인간은 모두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이제 곧 아시게 되겠지요. 인간의 다짐이란 허망하고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최근 시작한 사극 드라마 ‘화정’에 나온 대사다. 왕좌에 오른 광해군에게 상궁 김개시가 한 말이다. 광해군의 책사였던 개시는 조선사를 어지럽힌 요녀(妖女). 왕의 총애를 업고 매관매직을 일삼다가 참수형을 당한다. 권력욕에 목을 매단 인물이 인간사의 허망함을 입에 올린 것. 아이러니하지만 여운은 길다. 2015년 4월의 대한민국을 뒤흔든 ‘성완종의 욕망’ 때문이다.

6·25 전쟁기에 태어나 이 땅에서 만 64년을 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자,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을 겪은 그가 사업의 세계에서 성공을 욕망한 것을 누가 나무랄 수 있을까. 장학재단을 통해 사회의 존경을 얻고자 한 것은, 자수성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좋은 모델이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의 욕망을 정치권력 쪽으로 확장하며 부패와 결탁하게 된 것. 정치 쪽에서 힘을 얻고 싶은 그의 욕망은 유력자들에게 ‘돈과 몸과 조직’의 넌출을 전방위로 뻗었다. 여야,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그 넌출을 잡고 권력의 줄기가 된 자들이 항상 뒷배가 되어줄 것으로 믿었다.

그는 기업이 정치권력과 유착해야 산다는 소신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어느 사회평론가는 그것을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라고 비판했다. 우리가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서구의 경제학자들이 한국 경제에 매를 때리기 위해 초들었던 바로 그 정실 자본주의. 이에 대한 논의는 그 평론가의 언급처럼 단순하지 않지만, 우리는 지금 부패의 환부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실감하고 있다.

대한민국 공동체는 꼭 1년 전에 그것을 절감한 적이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에게서였다. 유 전 회장은 자작시 ‘크고 넓은 욕심쟁이’에서 자신의 욕망을 고백한 바 있다. “우주 한 곳에서/ 뭣이든지 삼켜버리는/ 블랙홀을 닮았나봐.” 뭣이든 삼켜버리는 욕망이 삼킨 것은 우리 사회의 희망이었다. 선진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은, 참사로 인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패의 진구렁에 빠져버렸다.

당시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은 유 전 회장 재산 축적 과정을 앞다퉈 소개하며 정치권력의 비호 혐의가 있다고 했다. 외환위기 때 우리 경제에 붙였던 정실 자본주의라는 딱지를 다시 붙인 것인데, 이번에도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 개인의 과욕이 공동체에 치욕을 안기는 경우로 기록될 것이다.

지난해 검찰이 유 전 회장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을 때 그를 비호한 정관계 세력의 부패 환부가 도려내질 것으로 기대한 국민이 많았다. 비극적 참사를 정치·사회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응원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소리만 요란했지 결과는 보잘것없었다. 그런 학습 효과가 있어서인지 이번엔 검찰 수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기대보다 더 높은 듯싶다. 대통령이 정치 개혁 차원의 수사를 부르짖었지만 그것이 이뤄지리라고 믿는 이는 많지 않다. 더욱이 이번 수사의 한 대상이 될 것이 분명한 야권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 무엇으로부터도 독립적이어야 할 수사가 정쟁(政爭)의 포격을 맞아 표류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할 상황이다.

정치 세력이 자신에게 불리한 일을 힘껏 방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동시에 공동체의 미래를 거시적으로 내다보는 것이 정치 세력의 본분이다. 이번에 부패 환부를 도려내지 못하면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은 정신적으로 삼류 국가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 한다. 여권이든, 야권이든 정황 증거가 뚜렷한 것까지 숨기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해선 안 된다. 이번 기회에 털 것은 털고 가야 자신에게든, 국민에게든 미래가 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 특히 성공을 꿈꾸는 이들은 성완종, 유병언 두 사람을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꿈을 향한 욕망을 어떻게 발현하고 절제해야 하는지 성찰한다면 뜻있을 것이다. 욕망은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동력이지만, 부패와 결탁할 때 삶 자체를 망친다. 영국 시인 존 밀턴은 경고했다. “욕망을 억제하라. 그렇지 않으면 죄와 그 검은 심부름꾼인 죽음이 너희를 덮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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