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민 / 정치부 선임기자

우리 정치권이 갖는 비극 중 하나는 자율적인 정치개혁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는 점이다. 대신 종종 사정(司正)이라는 타율에 의해 그 계기를 맞는 경우들이 있다.

이완구 국무총리의 부패 척결 진두지휘와 맞물려 시작된 전 정권 비리 수사,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과 리스트 폭로, 여론의 역풍과 국면의 반전, 이 총리 사퇴 표명과 현 정치권 수사…. 과거 정권을 겨눈 칼날이 현 정권을 향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헤겔의 표현을 빌리면 ‘이성의 간지(奸智)’다. 우연성을 매개로 필연성을 관철시키는 이성의 간지는 노회한 전략전술가의 음모보다 더 치밀하고 현실정치의 그 어떤 권모술수보다 더 영리하다.

성 전 회장의 죽음으로 반전 드라마를 쓰게 된 검찰 사정이 정치권 개혁을 넘어 빅뱅의 도화선이 되어야 한다는 바람은 최근 일련의 정국 상황을 목도하며 폭발 직전에 이른 여론에서 감지된다. 중남미를 순방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이 총리의 사퇴 의사를 전달받고 “검찰은 정치개혁 차원에서 확실히 수사해 모든 것을 명백히 밝혀주기 바란다”고 한 것은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담아낸 주문으로 읽힌다.

국민은 정치가 온전치 못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간다고 우려하고 있다. 우리 정치가 철저히 변해야 한다는 희망 이면에는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이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불신이 깔려 있는 게 사실이다. 성완종 리스트 공개 이후 드러난,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정치판의 민낯은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여야 정치권의 반칙과 특권은 여전했고,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관행도 계속됐다. 입으로는 개혁을 논하지만 실천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점도 확인됐다.

대한민국 정치가 정권 탈취와 권력투쟁만을 최고의 업(業)으로 여기는 한,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충족시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분오열의 파벌정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정권을 잡은 특정 정파의 독선과 독주가 계속될 것이다. 정치권과 기업의 부도덕하고 음험한 뒷거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포퓰리즘이 난무하고, 국익은 집단이익과 사익의 뒷전으로 밀려날 것이다. 창의와 효율의 시대에 냉전적 이데올로기 투쟁을 일삼는 전(前)근대성도 온존될 것이다. 여당이 대통령의 눈치만 살피고 야당이 운동정치의 관성에만 매달리는 한 한국 정치는 성장을 멈춘 ‘양철북’의 모습을 피할 길이 없다.

법 조항을 찔끔찔끔 손보는 식으로 정치개혁은 결코 이뤄질 수 없다. 국회선진화법이 국회의 공전과 파행을 막아냈는가. 답은 분명하다. 정치개혁은 결국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의 대대적인 등장과 이를 통한 정치판 물갈이로 시작돼야 한다. 이것이 정치빅뱅이다. 다행히 이를 가능케 하는 고무적인 징후들이 있다. 정치권 전방위 사정에 대한 여론, 오픈 프라이머리를 포함한 정당 개혁 및 공천·선거제도 개혁 움직임 등이 그것이다. 내년 4월에 치러질 20대 총선은 정치빅뱅을 확인할 기회다. 정치개혁의 싹은 검찰 사정으로 움텄지만, 그것을 배양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국민적 관심과 참여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minski@munhwa.com
허민

허민 전임기자

문화일보 /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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