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세월 품은 김포장 날 좋을때 방문객 5000여명 장날엔 김포대로변 車 빼곡 빈대떡·고갈비 향 발길 잡아 각설이 품바 공연 흥 돋우고 한쪽에선 고요하게 장기두고 따뜻함·진솔함·살가움·질박함 情이 흘러 넘쳐 靜이 되는 곳

(39) 이기와 시인이 본 경기 김포 5일장터 일대

수신과 성찰, 지혜를 담고 있는 ‘채근담’이라는 책에 보면 동중정(動中靜)이라는 말이 나온다. ‘움직임 가운데 고요함’, 부언하자면 바쁘고 시끄러운 곳에서 얻어지는 ‘고요’가 진정한 고요라는 것이다. 시끄럽기로 말하자면 장바닥만큼 시끄러운 곳이 또 있을까. 난 오늘 그 속에 들어가 고요를 얻는다. 사람들의 정(情)이 넘쳐 정(靜)이 되는. 따뜻함, 정겨움, 진솔함, 살가움, 풋풋함, 질박함……, 이런 정서가 한데 어우러져 고요한 삶의 향기를 피워내는 곳. 살아가는 저마다의 방식과 다양한 표정들이 좌판에 생생하게 진열되어 있는 곳, 김포에는 아직 5일 장터가 있다.

1일·6일 양곡장, 2일·7일 김포장, 3일·8일 마송장, 4일·9일 하성장, 5일·10일 군하장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김포장은 모란장, 포천장, 일산장과 함께 경기 4대 장으로 알려져 있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봄, 가을철 날씨까지 좋으면 방문객 수가 4000∼5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대형마트가 즐비한 요즘 장꾼들이 모여 마을 공터에 시장을 여는 ‘5일장’은 보기 드문 신풍물 중 하나가 되었다.

장(場)의 유래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가요인 ‘정읍사’에는 보부상의 아내가 오랫동안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근심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당시 남자들이 여러 날 행상을 하러 집을 떠나 있기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열흘에 한 번씩 열리는 장도 있었는데 15세기 말 흉년이 든 해 장문(場門)이라고 하여 백성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으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여 위급을 면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17세기 말에는 왕래가 보다 활발해져 대체로 5일에 한 번씩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김포장은 100년의 세월을 먹었지만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수적으로 작은 시장이 서곤 했다. 그 이유를 들자면 지리적 조건의 하나인 포구가 발달하여 시장의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통진의 조강포는 시장 기능을 수행했던 대표적인 포구이다. 우시장을 겸한 오라리장도 유명했다고 한다. 장터 자리를 놓고 서로 자기가 주인이라고 싸우거나 주인권을 놓고 거래하는 일이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 그 당시 상거래가 활발했음을 볼 수 있다.

사는 게 팍팍하고 우울한 사람들, 특히 갱년기 여성들은 자주 장터에 나가 볼 일이다. 장터에 스민 은근한 술렁거림이 말초신경을 자극해 얼굴에 화색이 돌게 하고 침샘 분비가 왕성해져 위장운동도 촉진될 것이라 장담한다. 계산대 앞에 로봇처럼 일렬로 줄을 서서 바코드에 따라 셈을 하는 기계식 상거래 장소와는 사뭇 다른, 덤으로 더 주고, 기분에 따라 얹어 주고, 잔돈이 없으면 우수리는 퉁 치고, 지갑이 비면 외상도 해 주고, 누구네 집 딸이 시집가서 쌍둥이를 낳았다는데…….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도 건네면서 무릎을 치고, 손뼉을 치고, 어깨를 얼싸안고 팔짝팔짝 뛰는, 이 같은 희비의 인간극을 어디 가서 쉽게 볼 수 있겠는가? 요즘 유행하는 힐링 장소가 이런 곳이 아닌가 싶다.

사우동 공설운동장 부근에서부터 북변동까지 약 500m에 달하던 장터의 길이와 규모가 15년 전부터는 북변공영주차장 부지로 축소 이전됐다. 신축 건물이 들어서고 길이 재정비되면서 어쩔 수 없는 변화로 보여진다. 오늘이 장날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는 건 8차선 김포대로변으로 차들이 빈틈없이 길게 주차돼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장날만큼은 장터 인근 차도에 주정차를 해도 단속을 하지 않는다. 녹두빈대떡 부치는 냄새, 고갈비 굽는 연기와 냄새가 바짓가랑이를 붙들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북적이는 분위기에 이끌려 고개를 장터 방향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한 손에 지폐 한 장을 꼭 쥐고 엄마 심부름 가는 대여섯 먹은 꼬맹이처럼 폴짝폴짝 발걸음을 가볍게 옮기며 두 팔을 흔들면서 나는 장터로 간다.
김포 5일장 장날을 맞아 차일 친 노점들마다 채소와 과일, 해산물, 반찬류들을 차려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김포 5일장 장날을 맞아 차일 친 노점들마다 채소와 과일, 해산물, 반찬류들을 차려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부모들 시대에는 장날에 맞춰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나와 모처럼 대중목욕탕에서 목욕도 하고 선지해장국으로 영양보충도 하고, 나온 길에 은행 일도 보고, 우체국 일도 보고, 점집에 들려 그 날 운수도 보곤 했다. 타 지역 사람이라면 장터로 향하다 우연히 북변동 48번 국도 교차로에 우뚝 선 중봉 조헌 선생 동상을 보기도 할 것이다. 중봉 조헌 선생은 조선 시대에 김포 통진현감으로 있었던 유학자로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투쟁하다 금산전투에서 700명의 의사와 함께 순절한 인물이다. 그 주변에서 벼 가마니와 벼 이삭을 표현한 철제조각물과 함께 ‘한반도 최초 벼 재배지 김포’라고 새겨진 커다란 돌반석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오래전 김포를 다녀간 사람이라면 다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을 것이다. 김포대로 양편에서 “잘 가세요, 또 오세요” 손을 흔들며 반기던 코스모스 풍경이다. 그때는 그것이 김포의 상징처럼 보였으리라. 내가 20대이었을까. 코스모스 너머로 황금 들녘이 보이고 그 광활한 풍경을 차창으로 바라보며 지나갈 때면 가슴에 뭉클 한 것이 치고 올라오는 느낌이 있었다. 그 묘한 느낌이 무엇이었을까. 지금 짚어보면 청동기부터 이곳에 모여 살던 선조들의 숨결과 축적된 정신이 훅- 내 숨을 따라 들어와 그들 의식의 스펙트럼과 내 영혼이 만나 출렁였던 간섭현상이 아닐까 상상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김포장에서 이동식 다방(일명 커피차)을 운영하는 아주머니는 내게 커피 한 잔을 700원에 건네면서 이 장사를 한 번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권한다. 내가 하면 잘할 것 같다나(웃음). 폭이 60㎝, 높이 1m50㎝ 밖에 안 되는, 밑에 네 바퀴가 부착되어 있어 장바닥 좁은 틈을 자유롭게 굴리고 다닐 수 있는 커피 수레가 보기엔 별거 아닌 것 같은데 2000만 원에 달하는 몸값을 지니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장터 안에는 우리가 모르는 장꾼들만의 상도덕이 있고, 질서가 있고, 영역이 있다는 것. 돈을 벌고 싶다고 누구나 불쑥 그 틈에 들어가 난장을 펴지는 못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숨어 있는 것이다.

김포장에서 자리를 펴는 장꾼들은 보통 10년에서 30년 동안 젊음을 팔며 한 자리를 지켜 온 관록이 붙은 사람들이다. “뻥이요∼”를 외치는 저기 뻥튀기 장수도 그렇다. 병아리, 새끼 염소, 강아지, 뱀, 새, 금붕어 등 생목숨을 파는 장사꾼도 노장이다, 깨강정과 같은 옛 과자를 파는 좌판은 50가지가 넘는 다양한 모양의 과자를 만들어 저울에 달아 파는데 주인장이 손님을 놀라게 하려고 작정을 했는지 덤으로 주는 양이 상상을 초월한다. 생선살을 발라 기름에 튀겨 파는 곳, 인절미를 즉석에서 쳐서 썰어 파는 곳, 찹쌀 도넛과 꽈배기를 설탕에 묻혀 파는 곳, 먹는 장사꾼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입으로 먹는 게 아니라 눈으로 먹고 지나가야 할 때가 많다. 장터에 각설이 품바의 공연이 빠져서야 되겠는가. TV 인간극장에도 출연한 치매 어머니 효녀가수 안유라 씨가 품바춤을 추며 웃음을 자아낸다. 시끄러운 장바닥에서 고요히 장기를 두는 사람들도 보인다. 장기 삼매에 든 저들의 귀에는 장바닥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한쪽에 둘러앉아 시장밥을 먹는 장꾼들의 모습 또한 정적이다. 아니 시적이다. 안도현의 시 ‘장꾼들이/점심때 좌판 옆에/둘러앉아 밥을 먹으니/그 주변이 둥그렇고/따뜻합니다’라는 내용에서 느껴지듯이 아무리 시끄럽고 붐비는 장소이어도 거기에 삶의 무게만큼 꾸밈없이 살아가는 인간미가 서리면 잡음이 중화되어 고요한 세계로 비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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