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일 / 서울대 교수·언어학, 前 국립국어원장

국어기본법 제4조 제2항에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정신·신체상의 장애에 의하여 언어 사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민이 불편 없이 국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여야 한다.’ 따라서 정부는 청각장애인들이 불편 없이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책무가 있다.

청각장애인은 수화·구화·필담 등을 의사소통 수단으로 사용하므로 비장애인과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다. 의사소통 장애로 활발한 언어생활을 하지 못함은 물론 언어권·학습권·정보이용권처럼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 권리를 제한받아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단지 사회적으로 주변인으로 머문다는 점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직업 선택의 기회까지 제한받게 됨을 의미한다.

2013년 국립국어원에서 조사한 농인의 문해력(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장애가 없는 중·고생 집단이 평균 16.7점을 받은 것에 비해 성인과 학생으로 구성된 청각장애인 집단은 9.6점을 받아 현저하게 문해력이 떨어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상적인 취업의 기회를 얻기는 매우 어렵다. 사회적 소수자인 청각장애인의 언어권 확보는 청각장애인이 풍요로운 언어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물론 문화 다양성 시대에 문화 공동체로서의 사회적 통합 강화와 우리 사회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과제이다.

청각장애인의 의사소통 향상을 위한 정책에는 여러 걸림돌이 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청각장애인들이 제1언어로 사용하는 ‘수화’를 아직 언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수화를 한국어의 보조 수단 정도로 이해하고 있지만 수화는 한국어와는 완전히 다른 체계를 지닌 독립된 언어이다. 따라서 명칭부터 수화가 아닌 ‘수어(手語)’로 바꿔야 하며,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언어로서 지위를 보장하고 이에 대한 연구와 교육에 정부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현재 추진되고 있는 ‘한국수어법’(가제)은 반드시 제정돼야 한다.

현실적으로 수어 습득이 체계적이지 못하고 표준적이지도 못하기 때문에 취학 전 교육과 학교 교육에서 수어를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표준화된 한국수어를 널리 알리는 일에 정부가 앞장서야 한다. 표준화된 수어 교육을 위해서는 한국수어 표준화 사업을 꾸준히 수행해야 하며 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표준수어 웹사전을 제작하여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를 통해 보급해야 한다.

또한 수어가 일상생활의 의사소통에 그치지 않고 청각장애인이 전문 분야에서 활동하는 데에도 사용 가능하도록 격상돼야 한다. 그간 국립국어원에서 몇몇 전문 분야 수어를 표준화하여 보급해 왔지만, 이제는 더 많은 전문 분야의 수어를 표준화하고 보급해 청각장애인들이 여러 분야에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청각장애 아동의 제1 언어가 수어일 경우 비장애인인 부모와 대화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가정을 위해 정부에서는, 최근 다문화 가정을 위한 한국어 방문 교육을 지원하는 것처럼, 청각장애 아동 가정에 교사를 파견하여 수어를 지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의 날을 보내면서, 청각장애인이 의사소통에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수어를 독립된 언어로 인정해 청각장애인의 언어권을 보장하는 정책을 적극 추진하기를 제안한다. 이를 바탕으로 청각장애인이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여 삶의 질을 향상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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