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 국제부장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미·일 신안보동맹시대가 열림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의 과거사 프레임 외교가 위기를 맞았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한·일 관계의 정상화 조건으로 올바른 역사인식을 강조해왔다.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고, 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해결 의지를 보여야 한·일 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다는 박 대통령의 주장은 원론적으로 옳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가 대일외교 정상화의 전제조건이 되면서 한·일 정상외교는 중단됐고, 결과적으로 한·미 관계에까지 부담을 주는 단계가 됐다는 데 문제가 있다.

박 대통령이 역사 문제에 대해 옳은 말을 하면 할수록 한·일 관계는 물론 한·미 관계까지 위험해지는 역설적 현상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박 대통령의 과거사 프레임 외교를 중·일 양국이 모두 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식민지 시대 항일연대의 기억을 갖고 있는 한국과의 과거사 공조는 한·중 관계를 밀착시킬 수 있는 호재다. 박 대통령이 올바른 역사인식을 강조할 때마다 중국 시진핑(習近平) 정부는 적절한 수위로 일본을 비판함으로써 ‘과거사 연대’ 의지를 피력해왔다. 그러나 시진핑 주석이 과거사 문제에 대한 현격한 인식 차에도 불구하고 아베 총리와 지난해 베이징(北京)에 이어 최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것은 박 대통령처럼 과거사 문제를 유일무이한 외교의 전제조건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말해 중국이 한국과의 과거사 공조를 한·미 동맹 기반 흔들기 카드 정도로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중 과거사 연대는 아베 정권에게도 결코 불리한 게 아니다. 박근혜-시진핑 시대에 본격화하는 과거사 공조를 한국의 친중화 증거로 몰아붙이면서 결국 아시아에서 미국 편에 설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는 논리로 한·미 관계를 이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아베 총리의 미국 방문에 앞서 일본 측 인사들은 박근혜 시대 한국은 중국과 연대하는 수준을 넘어서 이미 친중화로 돌입했다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펴 왔다. 따라서 박 대통령의 과거사 중시 외교는 중·일 양국 모두에 한·미 동맹 흔들기의 소재로 악용되는 역설이 빚어지는 셈이다.

미·일 양국은 아베 총리 방미 기간 중 미·일 가이드라인을 개정하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을 마무리짓는 작업을 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그간 아베 총리의 과거사 접근법에 부담을 느껴왔지만 최근의 워싱턴 기류는 그런 행적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중국의 부상이라는 미래의 위협 앞에서 과거사에 대한 인식 차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게 오바마 행정부 인사들의 생각인 것이다. 정권 출범 초엔 특정 현안에 대한 대통령의 신념이 외교 전면에 투영될 수 있다. 그러나 임기 중반부에 접어들어서까지 기존 도식을 고집하는 것은 곤란하다. 외교 현실에 맞춰 눈높이를 조정하고 그래도 어려우면 국면 전환을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박 대통령이 올바른 역사인식을 우선시하는 기존 프레임을 고집한다면 우리 외교는 더 큰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과거사 프레임 외교에 미래가 있을 수 없다.

musel@munhwa.com
이미숙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