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시장 뒷골목은 산책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다 한가해지기를 반복한다. 골목 안 피노키오 책방 앞 노랑 ‘길냥이’도 자주 보인다.
동진시장 뒷골목은 산책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다 한가해지기를 반복한다. 골목 안 피노키오 책방 앞 노랑 ‘길냥이’도 자주 보인다.

(40) 김도혜PD가 본 마포구 연남동

서울 인사동에서 태어나 가회동에서 인생의 반을, 나머지 반을 마포에서 살았다. 영화를 공부한다고 미국 뉴욕에서 보낸 2년을 빼면 머리가 다 크고 나서는 늘 마포 주민으로 살아온 것이다. 집에서 가까워서 또 취향에 맞는 곳들이 많아서 늘 홍대 앞을 들락거렸다. ‘거절당하기’와 ‘기다리기’로 이뤄지는 영화 프로듀서 일을 하다 지친 맘을 달래려고 도자기 공방에 다니면서부터 연남동에 자주 가게 됐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놀러 가는 그곳에서, 일 관계 지인들과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 단골 식당에 가서도 말조심을 해야 할 정도였다. 동네에서 가장 큰 2차선 길에 중국집과 기사식당이 군데군데 있을 뿐이던 조용한 주택가가 서서히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과연 도시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생장한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지도를 보면 종이비행기 같기도 하고 초등학생이 그린 나무 같기도 한 이곳은, 1975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대문구 연희동 남쪽 귀퉁이를 뚝 떼어 마포구로 이전하며 ‘연남동’으로 태어났다. 천년고도의 일원이지만 그럴싸한 이름의 유래도, 랜드마크가 될 만한 곳도 없던 초라한 동네였다. 이곳 상권의 터주는 화교들이고 그 다음엔 기사식당이, 또 홍대 앞에서 밀려난 예술인들의 작업실이 자리잡았다. 그리고 ‘다른 것’을 추구하며 독립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동진시장’이 연남동의 랜드마크가 된 과정에 모든 것이 응축돼 있다. 상암동과 합정동이 개발돼 대형마트가 등장하자 이 전통시장은 점포들이 하나둘 문을 닫아 한동안은 폐가의 모양새였다. 이 버려진 시장을 주목한 사람들이 있었다. 폐교에 아틀리에를 만든 화가들처럼 요리사, 빵 굽는 사람, 여행자들이 이곳의 한적함을 편안해했고, 홍대 앞과 합정동 상권의 획일적 대형화와 치솟는 집세를 견딜 수 없었던 자영업자들이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어른과 아이를 위한 그림책을 파는 피노키오 책방, 홍차와 마카롱의 실론살롱, 베트남 반미 샌드위치의 라이라이라이, 미국식 아닌 멕시코 정통음식점 베무쵸칸티나, 빈티지 소품숍 네온문, 일본 가정식 40키친 등이다.

주인의 취향과 솜씨가 빛나는 보석같이 멋진 가게들 사이에 40년된 세탁소와 떡집, 철물점이 여전히 영업 중이다. 카페 리브레와 이심의 커피 맛은 이 골목 부가가치 창출의 일등공신이다. 정말 맛있는 식당과 술집들이 골목 구석구석에 숨어있다. 걸어서 10분 거리 안에 추천할 만한 집이 스무 개도 넘는다. 맛집 전문잡지들에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툭툭 누들타이, 바게트 터널샌드위치집 게티스버그, 아시아 창작요리 안주가 맛있는 달빛부엌은 언제나 손님이 가득해 자리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샐러드 전문점 리프레시5.7에서는 유기농 채소에 곁들이는 다양한 건강 드레싱과 빵을 직접 만든다. 새로 생긴 앤티크전문점 라헨느는 가구들과 더불어 찻잔과 식기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다른 상권과 뭐가 그리 다르냐고? 주인들의 개성과 철학이 다양한 매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버스를 잘못 내렸다가 이 동네가 좋아서 가게를 차렸다는 사람, 직접 만든 맥주와 함께 희귀한 수입 맥주들을 엄선해 판매하는 호프집 주인,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책들을 골라서 파는 책방 앞에 ‘길냥이’ 쉼터를 마련해 둔 주인. 이들 중엔 어떻게 장사를 하나 싶을 정도로 수줍다 못해 무뚝뚝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 차림새와 외모가 비범한 이들도 꽤 있다. 그러니까 다른 곳에서라면 문밖에서 기웃거리는 손님에게 “안으로 들어오세요” 하고 말할 테지만 이곳의 어떤 가게엔 “해치지 않아요. 구경하러 들어오세요”라고 써 붙여 두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난다고, 주민들도 방문자들도 이런 사람들과 합이 잘 맞는 편이었나 보다.

가게 이름과 메뉴도 위트가 넘친다. 미용실 자리에 건축사무소를 내면서 ‘미용실’이란 상호를 그대로 쓰거나, ‘콜라겐 주유소’라는 이름의 족발집도 있고, 비누 공방 이름이 ‘be new’다. 술집 오복네 메뉴엔 ‘회장님 가오세트’ ‘부장님 팀회식세트’ ‘사원 한풀이 세트’가 있고, 초콜릿 전문점 17℃는 카카오 농도가 다른 네 가지 종류의 초콜릿 음료를 제공한다. ‘전문점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하는 것 같다. 자리가 없어 그냥 돌아가는 손님에게 10% 할인쿠폰을 주는 술집도 있다. 주인의 마음씀씀이가 가상하지 않나.

자본만으로는 흉내낼 수 없는 경쟁력을 가진 가게들 중에 공방이 약 40개 포진해 있다. 가죽, 가구, 캔들, 뜨개질, 가방, 금속공예, 그림책, 도예, 팔찌, 비누, 바느질, 플라워아트 등의 강습과 전시, 판매를 겸하는 곳들이다. 카페나 디저트 전문점 중에는 수업을 함께 진행하는 곳이 많다. 디자인섬에가다에서는 캘리그래피 수업을 진행하며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고, 케플러49는 일러스트레이션과 페이퍼 팝업 전문이다. 또 네타스 키친에서는 쿠킹클래스와 주말 마켓을 열고, 브라이트 모닝에서는 강원도 농수산물을 소개하며 민들레 페스토 같은 것들을 판매한다.

공방을 비롯한 연남동의 다양한 정보는 ‘연남동 자리’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이 모임은 생활창작공간 ‘새끼’, 문화연대, 북카페 산책, 의료생활협동조합 제너럴 닥터 등을 통해 마을 사람들의 만남의 장을 마련하며, 사이트(www.yeonnamzari.com)도 운영하고 있다. ‘공방 링크 프로젝트’는 연남동 주민들에게 공방을 소개하고 공방과 주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을 만들어 가는데, 매달 열리는 벼룩시장 ‘따뜻한 남쪽’이 대표적이다. 어린이 창작 캠프 ‘따뜻한 남쪽나라 아이들’은 어린이들이 방과 후 모여서 함께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연남동 골목엔 모텔이 한 개도 없는 대신, 게스트하우스들과 명상센터가 있다.

최근 경의선 숲길 공원이 완성되면서 연남동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맛집과 카페를 찾아 큰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조금 걱정되기 시작한다. ‘별다방’ ‘콩다방’을 비롯한 거대자본의 가게들이 들어와서 연남동의 개성과 멋을 만든 사람들이 밀려나고, 특유의 매력이 사라져 버릴까 봐.

연남동의 특색이 쉽게 변할 것 같지는 않다. 하나의 지하철역에서 비슷한 시간이 걸리는 곳에 있는 홍대 앞이 ‘화려함’과 ‘번잡함’을 계속 담당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연남동은 개성 넘치는 가게 주인들이 만들어가는 터전이기도 하지만, 마을공동체 운동과 사회단체들 활동의 근거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환경운동단체인 생태지평, 성매매 피해여성을 보호하고 자립을 지원하는 단체인 한국 여성의 집도 이곳에 있다. 이웃한 성산동 마을공동체의 성공에서도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돈 없이도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남아있는 한 연남동 문화는 그 다양한 매력과 개성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집들이 모두 가게로 변하는 불상사가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겠지만, 그것은 몇 분 거리의 홍대 앞이나 한강에 가까운 동네들이 대신해 주고 있으니 한동안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연남동이 계속 변두리 같았으면 좋겠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세요’라는 표지가 곳곳에 박혀 있는 그런 동네들은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나만의 솜씨를 가지고 세상의 한 구석에 자리를 튼 사람들과 조용히 교류하며 느리게 흘러가는 동네, 어쩌면 지금 서울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곳은 이런 곳이 아닐까.

영화·뮤지컬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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