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지난 4월 말 일본 시장에 전략 스마트폰 갤럭시S6 모델을 출시하면서 ‘SAMSUNG’로고를 지우고, 대신 현지 이동통신사인 ‘NTT docomo’로고를 새겨 넣었다.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점유율 1위임에도 유독 일본에선 5위에 그치면서 ‘삼성 스마트폰의 무덤’으로도 불리는 일본 시장을 뚫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삼성전자가 브랜드 파워이자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회사 이름까지 포기한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미국과 서양을 추종하면서 아시아를 한 수 아래로 보는 일본의 뿌리 깊은 ‘맥아더신드롬’, 여기다 최근 한·일 과거사 갈등 와중에 일본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는 혐한(嫌韓) 기류도 작용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실제로 식품을 제외한 상품들은 일본에서 한국산임을 가급적 밝히지 않는다. 모바일 메신저 ‘라인’은 일본·미국 증시 상장까지 거론될 정도지만 ‘한국 네이버’임을 감추고 있다. 침구 청소기 역시 대히트를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한국 제품인 줄 모른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 구입해 한국으로 들여오는 사람도 있다. 한국 제품의 경쟁력이 있다면 언젠가 상황은 바뀔 것이다. 과거 일본은 싫어하면서도 일제(日製) 전자제품에는 열광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결국 시장의 힘이 관철되게 된다. 제품의 경쟁력이 혐한 감정도 뚫고, 언젠가 ‘삼성’ 브랜드로 당당히 경쟁할 날이 올 것이다.
이런 원리는 ‘제품’을 넘어 ‘국가’ 차원에서도 작용한다. 최근 미·일 신(新)동맹시대의 이면에는 부활하는 일본 경제가 버티고 있다. 일본의 자금력과 기술력이 미국을 움직인 것이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던 1941년 12월 7일은 미국의 ‘국치일’이나 다름없다.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개전(開戰) 연설을 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29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연설했고, 미국 상·하원 의원들은 기립 박수를 쳤다. 미국은 ‘아베네시아’(Abenesia, 아베건망증)를 용인, 일본 재무장의 길까지 열어주었다.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방안까지 합의했다. 그 뒤에 ‘엔화의 힘’이 있다. 최근 일본 경제의 부활은 눈부시다. 아베 총리가 취임했던 2012년 12월 26일 당시 1만230이었던 닛케이지수는 2만 선을 돌파했다. 지난해 일본 기업의 매출증가율은 한국 기업의 3.4배다. 양적 완화와 엔저 덕분이지만 일본 정부 주도의 강력한 구조조정도 빼놓을 수 없다. 미쓰비시중공업이 발전사업 세계 1위 기업으로 부상하고, 소니가 사업 구조조정을 통해 순이익을 237% 끌어올렸다. 지난해 제정된 ‘산업경쟁력강화법’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기업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 하겠다”는 아베 총리의 뚝심은 무섭다. 총리 집무실 한쪽에 주가와 환율을 나타내는 전광판을 걸어놓고 매일 챙긴다고 한다. 메이지(明治)유신의 기치였던 ‘부국강병’을 통해 일본의 옛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아베의 의지는 경제를 넘어 미·일 신밀월로 나아가고 있다. 내년부터 시행될 것으로 보이는 법인세실효세율 최대 3.3% 인하 정책은 살아나는 일본경제 불길에 기름을 부을 것으로 보인다. 법인세 인하에 대해선 일본 야당 역시 침묵으로써 사실상 동의를 표하고 있다.
한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실물경제는 4분기 연속 0%대 성장률로 맴돌고, 구조개혁은 실종 상태다. 경제 활성화 법안들은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강한 외교는 강한 경제에서 나온다. 외교 전술로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다. 안보도, 복지도 경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다. 한국민의 자존심을 짓밟았다며 아베의 연설에 분노하기에 앞서 이를 악물고 경제를 살리고 키우는 것이 진정한 극일(克日)이다.
“한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따라갈 우려가 있다”는 경고도 있지만 이제는 “한국경제가 일본의 반만이라도 따라가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 형편이다. 한국 외교의 무능을 탓하고 일본 정치권을 규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아베가 일본경제 부활에 쏟는 땀과 열정, 그 몇 배를 한국경제 강화에 쏟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일본이 한국을 ‘3류국’으로 모욕하고, 글로벌 외교가의 ‘왕따’로 몰아세우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일본이 그렇게 할수록 그 대응의 최일선에 강한 경제가 있어야 하는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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