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완 / 성균관대 교수·행정학, 前 기획재정부 장관

공무원연금 개혁이 결국 유보됐다. 공무원 노조가 야당을 움직이고, 야당이 여당의 발목을 잡은 끝에 나온 합의안은 구조개혁 대신에 모수만 바꾸는 용두사미가 됐다. 과거에도 세 차례나 그랬던 것처럼, ‘빅 뱅’을 포기하고 공무원연금 적자 폭을 서서히 줄여 나가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느닷없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까지 끼어들면서 합의안은 엉뚱한 모습으로 변질됐다.
 
많은 전문가가 엉터리 개혁안을 서둘러 처리한 것보다 차라리 무산된 것이 잘된 일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일본처럼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을 일원화하거나 ‘연금 피크제’ 등 후속 개혁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의미다. 일정 수급 기간이 지나면 연금액이 차차 줄어드는 피크제는 재정 부담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장수 퇴직자와 단명 퇴직자의 형평성도 맞출 수 있다. 피크제는 특정 연령대에 진입하면 교육비, 경조사비, 여가활동비 등이 크게 줄어드는 노후 소요 자금 주기와도 부합한다.
 
이번 파문을 보면서, 개혁안 자체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꼭 짚어야 할 문제는 개혁의 절차에 관한 인식이다. 정부·여당은 국민에게 큰 부담을 지우는 소득대체율 문제는 먼저 국민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옳은 얘기다. 국가 정책에 대한 국민 동의는 필요하다. 또 법률이든 예산이든 대의기관인 국회의 논의와 승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러나 제주 해군기지나 밀양 송전탑처럼 일련의 갈등 사례에서 보듯이 ‘국민 동의’를 ‘이해(利害) 당사자의 동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대다수 국민이 국민연금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동의가 필수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흡연자가 동의해야 담배소비세를 인상하고, 유족이 원하므로 세월호 선체를 인양해야 한다는 논리로 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동의해야 지하철 경로우대 요금제를 바꿀 수 있고, 농민이 동의해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누구에게도 피해는 끼치지 않으면서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이익이 되는 이른바 ‘파레토(Pareto) 향상’만 좇는다면 국정은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케네스 J 애로는 안타깝게도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만족시키는 완벽한 의사결정 방식은 없다’는 ‘불가능성 정리(定理)’를 설파했다.
 
당사자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되, 최종 결정에는 오히려 당사자 참여를 배제하는 것이 공정하고 합리적이다. 법관이 자신과 관련된 이익 상충 사안에는 제척·기피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공무원연금 개혁안이 이해 당사자의 참여와 합의를 이끌어내 갈등 해결의 모범 사례가 됐다는 인사혁신처의 자평은 후환을 남길 수 있다. 오랫동안 논의하고서도 끝내 결렬된 노사정위원회 역시 마찬가지다. 당사자(경총과 노총)가 참여하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알맹이 있는 합의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과욕이었다. 당사자들끼리, 그리고 정부와 당사자가 소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궁극적인 선택은 결국 정부의 몫이다.
 
독일이 ‘유럽의 병자(病者)’에서 벗어나 오늘날 ‘유럽 경제의 후견인’으로 발돋움한 배경에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추진된 이른바 ‘하르츠(Hartz) 개혁’이 있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페터 하르츠 등 15명의 전문가로 위원회를 꾸려 실업 대책을 주문했다. 그런데 재계·노동계·정치권·정부 등 당사자는 위원회에서 철저히 배제했다. 당사자의 입김이나 표심(票心)에 오염되지 않은 4단계 노동시장 개혁 방안의 원동력은 여기에서 나왔다.
 
과감한 개혁의 대가로 나중에 슈뢰더 총리는 정권을 잃었다. 실질임금이 하락하는 등 기존 취업자의 부담은 부각된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과실은 대다수 독일인에게 조금씩만 돌아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르츠 개혁은 슈뢰더의 정적(政敵)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인정할 만큼 크고 긴 울림을 낳았다.
 
개혁을 하려면 비전을 제시하고 당사자의 애로를 경청하며 최선을 다해 반대파를 설득하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당사자 동의는 필요조건이 아니다. 다수의 공감대만 확보되면, 일각에서 욕을 먹더라도 공익위원안(案)을 중심으로 결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급한 노동 개혁을 비롯해 나라가 직면한 산적한 난제를 풀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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