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권 / 서울대 명예교수·헌법학

냉전 시대부터의 강자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G2로 부상하는 중화제국, 이에 맞서는 경제 대국 및 군사 대국화의 일본과 이제는 핵 소형화를 추구하는 북한에 둘러싸인 세계 속의 우리나라가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기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통일의 성취를 비롯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에 떳떳하게 기여하는 나라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 답은 분명하다. 인권이 존중되면서 과학기술적·경제적으로도 강력한 민주국가가 되는 것이다. 나라가 꼭 필요로 하는 일을 해내지 못 하는 민주정치는 국민에게 좌절을 안길 뿐이다.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침체된 경제동력을 살리기 위해 의욕적으로 규제 개혁, 노동 개혁, 연금 개혁, 부정부패 척결 등의 과제를 추진했지만, 아직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 하고 있다. 여야 합의로 큰일을 성취했다고 큰소리로 내놓은 공무원연금 개혁안은 잘 봐야 다음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고 기득권은 거의 그대로 인정한, 눈 감고 아웅 격의 국민에 대한 속임수였고, 그나마도 국민연금과의 연계 문제 때문에 4월 임시국회 마감일인 6일 통과가 다행히 또는 불행히 좌절됐다.

이 개혁안에 대해 분노한 심층 분석이 쏟아져 나오면서 국회의, 그리고 야당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해 국민은 새삼 의분을 토해 왔다.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어렵게 통과된 이른바 김영란법에서 국회의원들은 교묘하게 이 법에서 빠져나가는 예외 조항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이익충돌 방지조항은 아예 도려내고 통과시켰다. 의원이 관련된 이른바 입법 로비 사건들, 고 성완종 회장의 정경 유착의 행적들은 그 반대의 필요성 그림을 극적으로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일 안 하는 국회의 오명(汚名)을 들어온 지는 오래다. 일 안 하는, 또는 일 못 하는 큰 이유 하나는 견제와 균형의 민주 원칙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부·여당이 독주 못 하게 하는 견제와 균형을 핑계로 선진화법도 채택되지 않았던가? 이제는 선진화법 탓에 일을 안 하거나 못 한다. 국회가 꼭 필요한 일을 안 하면 정부가 일을 하지 못 하고 그 피해는 나라와 국민에게 돌아간다. 합리적 이유도 없이 오로지 견제와 균형을 명분으로, 또는 정부가 죽을 쒀야 다음 총선이나 대선에 유리하다는 계산 때문에 사사건건 정부의 발목을 잡는 것은 결코 능사가 아니다. 국익을 위해 견제할 것은 견제하고 지지(支持)할 것은 지지하며 책임질 것은 책임질 줄 알아야 선진 민주국가다. 견제나 지지나 책임이 당리당략적 고려에서만 움직인다면 그것은 삼류 민주국가의 관행이다.

국회 접수 100일 만의, 박상옥 대법관 임명동의안의 다수결에 의한 국회 통과는 비록 선진화법에 따른 국회의장의 상정에 따른 것이지만, 다수결의 원칙이야말로 책임정치의 원형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수의 지지로 집권한 정부와 여당은 그 정책을 다수결로 소신껏 밀고 나가고 다음 선거 때의 승패(勝敗)로 그 책임을 지거나 물으면 된다. 원래 다수결은 민주적 신임의 원리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책임을 지고 묻는 원리이기도 하다.

선진화법은 민주적 책임정치의 헌법 원리에 어긋난다. 이번 표결에서 떳떳하게 반대표를 던지지 못 하고 퇴장한 야당의 행태는 책임정치의 원리를 저버린 비겁한 정치 행태다. 국민에게 잘잘못의 신임을 묻겠다는 태도를 회피하고, 그래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무책임 의사의 표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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