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덫에 걸렸다.’ 최근 벌어지는 일련의 법안 처리 과정을 보면 국회가 스스로 파놓은 덫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는 형국이다. 올무처럼 빠져나오려 하면 할수록 더 조여들어 이대로 가다간 국정(國政)이 고사(枯死)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하게 한다. 아직 개혁해야 할 법과 제도가 수두룩한데 ‘좋은 게 좋다’식의 타협주의가 만연하면서 대한민국이 여기서 주저앉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많다.
박근혜정부가 올 들어 개혁의 ‘골든 타임’이라며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공공·노동·금융·교육 개혁 중 첫 번째 과제인 공무원연금 개혁이 결국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처리 날짜까지 명시하고 대통령과 여야가 모두 이 문제에 집중했지만 좌절되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공무원연금 개혁 문제를 보자면 일단 출발부터가 문제다. 혁명보다 어려운 것이 개혁이라고 했듯이 개혁은 고통과 인내를 요구한다. 개혁은 일방이 피해를 보게 마련이다. 기득권을 내려놔야 하는 것인 만큼 모두가 만족하는 개혁은 애초부터 있을 수 없다. 개혁을 했다고 했는데 아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여야는 ‘사회적 합의(合意)’라는 강박관념에 빠져 개혁의 대상인 공무원 단체를 여야와 함께 공무원연금특위에 넣어 논의하게 했다. 국민에게 권한을 이양받아 선출된 국회의원이 이익단체들과 동격으로 논의 구조에 참여하고 결정권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슬로건 아래 합의민주주의(Consensus Democracy) 모델을 적용한 것이다. 이해 당사자가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는 것은 비용을 최소화한다는 면에서 유용하다. 그러나 국회가 다양한 이해집단의 의견을 들을 수는 있지만 이들을 직접 입법과정에 참여케 하는 것은 월권이자 민의 왜곡이다. 합의만 강조하다 보니 야합(野合)도 합의처럼 분칠하는 것이다. 이번에 공무원연금 문제를 논의하면서 논의 차원이 전혀 다른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현행 40%에서 50%로 높이기로 합의한 것이 대표적이다. 국민의 미래가 달려 있는 연금이 무슨 마트의 ‘1+1 끼워 팔기’처럼 취급되는 것 자체가 야합의 이면이다.
공무원연금 개혁은 국민이 낸 세금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분배하느냐의 문제인데 당사자들을 협상의 주체로 넣었으니 그 결과는 시작부터 뻔한 것이다. 세월호 문제만 해도 여야가 국민 전체의 입장에서 판단하지 않고 유가족에게 끌려다니다 국민 일반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 분란을 계속 키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치 구조는 유럽식의 합의 민주주의와는 달리 미국, 영국과 같이 기본적으로 다수제 민주주의(Majoritarian Democracy)를 채택하고 있다. 한 표라도 많은 쪽이 모든 것을 갖는 구조지만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뤄야 하는 우리 상황에선 유용한 모델이었고 국민적 합의도 따랐다. 헌법 제49조에 규정된 과반(過半)원칙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2012년 4월 총선 전 새누리당 내 소장파가 주도한 국회선진화법은 과반을 ‘5분의 3’으로 대체하면서 이런 원칙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180석을 가져야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에선 누구도 주도권을 가질 수 없고 여당, 야당이 무의미하게 된 것이다. 5개월간 국회가 법안 하나 통과시키지 않아도, 상임위를 8개월간 공전시켜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 지금의 국회 현실이다.
합의 민주주의는 이해 당사자들이 자기 손해를 보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功利)주의적 정신보다 특정 집단의 행복만 추구하다 보면 조직화되지 않은 다수만 피해를 보게 되는 법이다. 고령화 시대에 많은 표를 가진 노년층을 위한 정책이 우대받는 반면, 정치참여가 낮은 청년층이 정책의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각종 이익 단체들이 자신들의 표(票)를 무기로 여야를 압박하고 입법에 개입하는 구조에선 개혁은 불가능하다. 노동, 교육, 복지 등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제일수록 더욱 그렇다.
선진화법이 하루아침에 개선되기 어려운 만큼 그래도 국정의 책임을 진 청와대와 여당이 나설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안에서 원칙론만 강조하지 말고 개혁의 선봉에 나와 지휘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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